적(敵)개념의 과잉시대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칼럼] 적(敵)개념의 과잉시대

그동안 끈질기게 우크라이나가 요구했던 독일산 전차 ‘레오파르트 2’의 우크라이나 반출을 독일 정부는 지난 1월25일 공식적으로 허락했다. 우크라이나 확전에 독일이 끌려들어 갈 위험을 우려해서 공격용 무기 제공에 신중했던 사민당 출신의 총리 숄츠가 국내외의 압력에 결국 손을 들었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미국의 압력도 강했지만, 연정의 파트너인 녹색당과 자민당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숄츠는 독일을 포함한 나토가 ‘참전국’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독일이 레오파르트 2의 반출을 우여곡절 끝에 허가한 그날로 우크라이나는 지원무기의 희망목록에 신형 전투기 유러파이터, 전투함과 잠수함 등을 올렸다.

여기서 나는 반전평화에 지금까지 어느 당보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여해왔던 녹색당이 우크라이나에 무기공여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행보에 눈을 돌리게 된다. ‘녹색당이 이제 전차당이 되었느냐’, 녹색당의 상징적 인물의 하나였던 페트라 켈리(1947~1991)를 떠올리며 ‘페트라 켈리가 무덤에서도 등을 돌릴 것이라’는 비난과 비판의 소리도 들린다.

독일이 80년대와 오늘날 해결해야 할 과제와 이의 해결방식 사이에는 사실 많은 차이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말미암은 에너지 문제로 종래의 탈원전정책에 손질을 가했고, 얼마 전에는 갈탄을 사용한 발전소 건립도 허가해서 탄소 중립화를 가장 앞장서서 주장했던 녹색당의 정체성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두고 많은 논쟁을 낳았다.

이 모든 질문에 한결같이 나오는 답은 실용주의다. 원칙에만 묶여 있지 않고 유연성을 발휘해,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면서 원래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지연되는 탄소 중립을 빨리 실현하기 위해서도 우선 갈탄을 사용하는 화력발전소의 건설을 허가해야 한다는 논리, 유럽의 평화를 위해서는 먼저 우크라이나의 전쟁수행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렇다.

1999년 봄, 2차대전 후 처음으로 독일이 세르비아와 코소보 사이의 전쟁에 나토 연합군의 성원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사민당과 녹색당 연정 때 외무부 장관도 녹색당의 요스카 피셔였다. 당시 이 결정 때문에 당내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는데 이번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문제와 관련해서는 이상하게도 조용하다.

반전의 가치 깬 독일 녹색당 의아

이러한 차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국제정치적 지형도의 변화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침략전쟁을 감행한 러시아와 이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의 존재를 사실상 적국과 동맹국 관계로 보고 있는 데 있다. 물론 나토의 동진정책도 하나의 원인이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침략전쟁의 명분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외교적 방법을 통한 문제 해결보다는 우선 피해자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가 급선무의 과제이고 전투무기의 지원도 따라서 당연하다는 것이다.

지금 녹색당의 지지율에 근접하고 있는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의 지지자들은 이와 반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이 유럽을 러시아와 싸우도록 해서 유럽의 강자인 독일의 영향력을 통제하기 위한 세계전략의 하나로 보고 있다. 음모론적인 시각이라고 볼 수 있지만, 독일의 극우세력이 대러시아 민족주의를 담고 있는 ‘푸틴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독일의 우크라이나 무기지원을 둘러싸고 관여하는 나라들이 모두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녹색당 출신의 외무부 장관 안날레나 베어보크가 한 발언이 큰 파장을 나았다. 우크라이나에 레오파르트 2를 공여하겠다는 방침을 공표하기 바로 전날, 스트라스부르의 ‘유럽평의회’에서 베어보크는 ‘우리는 러시아에 대항해서 전쟁하고 있지, (우리 사이에) 서로 싸우는 것은 아니다’라고 발언했다. 여기서 우리는 물론 유럽연합을 의미한다.

이 발언에 대하여 러시아 외무성은 즉각적으로 ‘독일은 한편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 참전국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국가들은 지금 러시아와 전쟁 중이라고 했다.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당신들 스스로는 이해하고 있는가’라고 반박했다.

미숙한 젊은 외무부 장관의 큰 실언이라지만 이미 알려진 비밀을 발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서 얼마 전에 있었던 윤석열 대통령의 외국 순방 중에 남긴 발언이 떠올랐다. ‘형제국의 안보는 바로 우리의 안보다.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적은, 가장 위협적인 적은 이란이고, 우리의 적은 북한이다’라는 발언에 대하여 이란은 ‘전적으로 무지하다’ ‘심각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표현으로 곧 항의했다.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적이 이란이라는 말은 이 두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제3국의 통치권자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실언이었다. 이란은 이를 남한과 아랍에미리트연합 사이에 있었던 이미 알려진 비밀에 대한 하나의 확증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실언에는 현재의 남북한 사이의 심각한 적대 관계를 단순하게 다른 나라에도 그대로 투영시켜 이 두 나라도 사정은 우리와 마찬가지거나, 아니면 비슷할 것이라는 추론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는 그러나 사실관계에 배치된다.

서방 측이 주도하는 경제 제재 아래서도 이란에 아랍에미리트연합은 중국 다음의 최대 수입국이고, 한국에 이은 다섯 번째의 수출국이다.

이렇게 복잡한 국제관계에도 러시아, 중국, 이란 그리고 북한이 오늘 날 거의 의심할 바 없는 국제사회의 적으로 인식되는 일반적인 현상의 본질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의 하나로서 나치 독일의 대표적인 공법학자 카를 슈미트(1886∼1985)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이에 따르면 국내정치에서 언급되는 정적이나 국제관계에서 규정되는 적국을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은 적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적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정치가 있을 수 없고, 이는 종교적, 윤리적, 심미적, 경제적인 정의의 밖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적과의 투쟁 속에서 살아야 하는 자는 적이 살아 있어야만 그의 존재가치가 있다는 역설을 지적한 니체의 궤적을 쫓고 있다. 따라서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해야만 하는 평화주의는 ‘정치 없는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성립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보복 악순환은 우리를 장님 만들어

냉혹한 정치적 현실주의의 이런 기조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유럽의 전통적인 보수주의나 신보수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 자유주의와 이른바 실용주의적인 평화주의 안에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식민지, 분단, 전쟁, 군사독재 그리고 이에 저항한 강렬한 투쟁도 있었지만, 한국의 정치에는 기본적으로 이런 슈미트류의 보수적 혁명이 요구하는 결단주의와 초법주의가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 윤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적’인 북한과 남한의 ‘종북세력’의 온상인 노동운동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하는 결단력과 추진력을 높이 사는 것도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이런 현실을 일종의 ‘정서적 내전상태’로서도 볼 수도 있지만, 스페인 내전에서 보였던 반파시스트 공화파와 프랑코가 이끈 국민파 간의 유혈투쟁을 뒷받침했던 그런 과격한 정서는 아니다. 그러나 선과 악, 빛과 어둠의 두 세계로 모든 것을 갈라 보는 마니교적인 정서가 사회 전반에 걸쳐 흐르고 있기에 대화와 소통공간의 확충을 대다수가 절실히 바라고 있다.

이해관계의 심도에 따라 내 편과 네 편을 갈라 끼리끼리 뭉쳐 싸우는 가운데 국내정치에서 흔히 입에 올리는 적이나 정적은 ‘관습적인 적’의 개념에 속한다. 그러나 남북관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적 또는 주적은 그러한 개념이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파괴하는 것도 포함하는 ‘절대적인 적’ 개념이다.

신자유주의가 증폭시킨 강자와 약자 사이의 심한 갈등, 신냉전이 몰고 온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지구촌의 패권 경쟁의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를 지금 찾기는 사실 힘들다. 그런데 한국의 사회갈등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산출한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분야를 종합한 갈등지수에서 가맹국 가운데 제일 심각하다. 게다가 남북 간의 오랜 군사적 긴장과 북핵문제가 이와 엉켜 있다.

이런 위기의 상황이기에 가상의 적이거나 현실적인 적에 대한 경멸과 증오의 소리는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눈에는 눈’이라는 식의 보복과 복수의 악순환은 우리 모두를 장님으로 만든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경고를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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