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동의간음, 이대로 잊히나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여성가족부는 얼마 전,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년)을 발표하며 형법 제297조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가, 그로부터 9시간 후 개정 추진을 철회했다. 갑작스러운 입장 번복에 대하여 온갖 추측이 난무하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법무부 장관의 전화 한 통에 엎어진 일이라는 주장도 있던데, 지금이 무슨 왕정국가인가. 법무부가 새로운 형사 구성요건 도입에 적극적으로 찬성을 드러내는 경우는 애석하게도 거의 없었다.

추측이 아닌 확인된 어떤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성가족부의 기본계획 발표 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이 법이 도입되면 합의한 관계였음에도 이후 상대방 의사에 따라 무고당할 가능성이 있다”며 “성관계 시 ‘예’ ‘아니오’라는 의사표시도 제대로 못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성인남녀를 평가 절하한다”는 글을 썼다. 비동의간음죄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반대 이유들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비동의간음죄’라고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장면들이 있지 않은가. 합석하여 분위기 좋게 술 한잔 하다가 서로 슬그머니 자리를 이동하는 장면, ‘나 못 믿어?’나 ‘손만 잡고 잘게’ 등으로 소비되는 어떤 장면들 말이다. ‘비동의’를 주장하는 주체를 여성만으로 애써 축소하는 것, ‘동의 여부’를 나중에 판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단정 짓는 것들도 이러한 해묵은 장면들과 연결되어 있다.

사실 비동의간음죄 도입은 여성가족부의 돌발행동이 아니다. 비동의간음죄 도입 법안은 지난 20대 국회에서 현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을 포함하여 당시 5개 정당 10개 국회의원실이 대표발의했던 법안이었다.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와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수차례에 걸쳐 대한민국을 상대로 피해자의 ‘자유로운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을 정의하도록 입법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상대방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인 성관계를 한 사람을 형사 처벌할 필요성은 피해자 보호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해외는 어떨까. 영국은 2003년부터, 독일도 2016년부터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았는데 간음한 행위를 강간죄로 처벌하고 있다. 무조건 처벌은 아니다. 동의를 확인하기 위한 시도를 한 경우는 처벌을 면할 수 있고, ‘인식이 가능한 의사’였는지를 고려하여 판단하는 안전장치도 두고 있다. 미국도 여러 주에서 비동의간음죄를 처벌하고 있다.

비동의간음죄를 도입하는 것은 ‘성인남녀’를 ‘예’ ‘아니오’도 제대로 못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치부하는 것일까. 동의와 비동의는 우리의 일상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다면 최근 어떤 불편한 상황에서 “싫다”고 말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속마음으로는 싫더라도 입을 열고 성대를 울려서 ‘하지 마’라거나 ‘그만하세요’라고 정색하며 말한 적이 있는가. 도움을 청할 누군가가 없는 상태에서 ‘아니오’라고 소리 내어 확실히 말할 용기는 왜 굳이 일방이 부담해야 하는가.

물론 싫다는 표현은 말이 아닌 행동이나 표정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표현이 실제 행동의 멈춤까지 이어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의사를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상대방의 노력이다. 그 노력의 최소 수준을 굳이 국가가 처벌로서 상향할 필요까지 있겠냐는 볼멘소리도 있다. 그러나 성범죄는 성적인 욕구 앞에 인간의 존엄을 철저히 대상화하는 것이 본질이기에, 사람의 인격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힌다. 특정 성별의 유불리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럼 이대로 비동의 상태에서 일방이 간음한 행위를 단지 개인의 불운의 영역으로 남기자는 것인가.

모든 범죄는 무고의 가능성이 있다. 사실을 왜곡하여 애먼 사람을 잡는 부작용은 제도로 추려내어 바로잡아야 할 일이지, 정치적 판단으로 갈라 쳐서 앞뒤 없이 반대할 문제는 아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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