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얍실’하거나 ‘뻔뻔’하거나

박병률 경제부장

‘금(金)감원’이 아니라 ‘검(檢)감원’. 요즘 금융권에서 금융감독원을 이렇게 부른다. 윤석열 대통령의 복심으로 알려진 검사 출신 이복현 금감원장은 취임 이후 광폭행보를 보였다. 금리를 높여라 내려라, 금융지주 수장 이런 사람은 된다 안 된다, 일일이 하나하나 이 원장은 코멘트를 했다.

박병률 경제부장

박병률 경제부장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는 SM 사태도 빠지지 않았다. 그는 “상점(회사)을 지켜줄 종업원(이사)을 구하는데 그 종업원이 물건을 훔치는 습관이 있다면 ‘이건 안 된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며 자산운용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얘기했다. 가장 힘이 셌다던 이헌재 전 금감원장도 이렇게까지 주요 사안에 대해 대놓고 언급하지는 않았다.

금융사에 감독서비스를 제공하고 분담금을 받아 운영되는 금감원은 공무원 조직이 아니다. 금융감독 기능이 주어져 ‘반관반민’이라 부른다.

이복현 원장에 가려 정작 금융정책을 총괄하는 ‘진짜 관료’ 금융위원회는 보이지 않는다. 금융위원장의 존재감이 이렇게 없는 모습, 금융당국 출입 20년 만에 처음 본다.

증권가 찌라시에는 이 원장이 총선에 출마하고, 그 자리에 다시 검사 출신이 온다는 얘기까지 돌고 있다. 금융권 인사 몇명에게 물어보니 “전혀 근거 없는 소리겠느냐”는 반응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높으신 분들만 알겠지만 적어도 금융권 여론이 이렇다.

경상도 말 중에 ‘얍실하다’는 말이 있다. 야비하다는 뜻과 비슷하다. 진보정권은 앞에서는 정의로움을 강조하지만 뒤에서는 자신의 실속을 챙긴 ‘얍실한’ 이들이 많았다. 문재인 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민들은 실망했고, 그 반사이익으로 윤석열 정부가 탄생했다. 시민들이 윤석열 정부에 요구한 것은 공정의 실천이었다. 공정은 시대정신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확실히 뒤에서 얘기하지 않는다. 앞에서 할 말을 다 하고 있다. 시원시원하게 호통도 잘 친다. 그렇다면 2023년 3월은 2022년 3월보다 공정해졌을까?

정부의 등쌀에 밀린 KT가 구현모 대표의 연임 의결을 취소하고 4명의 전·현직 내부인사로 차기 후보군을 추리자 국민의힘은 기자회견을 열고 “인선 작업을 중단하라”고 비판했다. 대통령실은 백브리핑으로 거들었다. 당정이 미는 인사는 윤 대통령 캠프 출신의 윤진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과 김성태 전 자유한국당 의원으로 알려졌다. 민간기업에 대한 간섭이 과도하다는 지적이 있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내부 카르텔을 깨겠다”며 당당하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내가 권력을 가졌으니 뭐가 문제냐는 식 아니냐”며 “조금 더 나가면 ‘꼬우면 정권을 갖든가’로 들린다”면서 혀를 내둘렀다.

금융지주 CEO와 KT 대표 인선 과정에서 당정이 한 발언 수준으로 진보정권에서 개입이 이뤄졌더라면 어땠을까. 단언컨대 보수야당은 자유시장경제를 파괴시키는 “빨갱이” “공산당”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을 게 틀림없다.

노골적이긴 검찰 인사도 마찬가지다.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 기금위원회 산하 상근전문위원으로 검찰 출신 한석훈 변호사를 임명했다. 국민연금의 투자기업 주주권을 자문하는 기구라 주로 금융 및 회계 전문가가 맡아왔던 자리다. 비판여론에 복지부는 “규정에 따른 것”이라며 당당하다. 경찰 국가수사본부 본부장에 검찰 출신 정순신 변호사가 임명됐다가 아들 학교폭력 논란으로 취소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국민정서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앞서 교육부와 고용노동부에는 현직 검사가 임명되거나 파견됐다. 주요직에 자리 잡은 검사들은 대개 윤 대통령과 직간접 인연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민간회사에 대한 개입도, 검찰 출신 인사 기용도 ‘부조리를 뿌리 뽑겠다’는 깊은 뜻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가는 자신의 신념윤리를 폭력과 강권력으로 이행하려 하는데, 폭력과 강권력의 무자비함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무자비함의 희생자는 결국 자신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라를 정의롭게 만들겠다는 검사적 시각이야 갸륵하지만 5년 뒤를 생각한다면 한번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28일부터 지난 2일까지 조사한 결과를 보면 윤 대통령에 대한 긍정평가 이유로 ‘공정·정의·원칙’을 꼽은 비율은 11%에 불과했다. 시민들의 기대치가 낮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얍실함’과 ‘뻔뻔함’. 공정은 이 둘 사이에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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