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한 삼촌’ 같은 대통령

박영환 정치부장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워싱턴포스트가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진행했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묘사할 단어를 고르라고 했더니 ‘술 취한 삼촌’이 거론됐다. 가끔 명절에 집에 찾아오는 술 취한 삼촌처럼 볼 때마다 고개를 가로젓게 되고 말하는 걸 듣기도 싫은 후보였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거짓말쟁이’로 묘사했다. 정치적 술수로 살아왔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물이란 취지다. 이들 중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미국 시민들의 난감함을 알 수 있었다.

박영환 정치부장

박영환 정치부장

지난 한국 대선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여야 유력 후보 둘의 이미지도 트럼프, 힐러리와 닮아 있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술 취한 삼촌 같았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거짓말쟁이 같았다. 이 후보는 윤 후보를 ‘무식(無識)’이라고 공격했고, 윤 후보는 이 후보에게 ‘무법(無法)’이란 꼬리표를 붙였다. 정파성이 약한 중도층은 정말 투표하기 싫은 선거였다. 선거 결과 미국처럼 술 취한 삼촌이 간발의 차이로 선택됐다. 그리고 대선 1년이 지난 지금도 시민들은 대통령과 거대 야당 대표가 된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윤 대통령은 야당은 무시하고, 여당은 힘으로 억누르고, 남의 문제는 파헤치고, 본인 문제는 외면하는 정치를 하고 있다. 이 대표는 비리 의혹으로 끝없는 검찰 수사를 받으며 사법 리스크에 갇혀 있다.

술 취한 삼촌이 보이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품위와 운치가 없다. 반말이 대부분이고 욕도 입에 뱄다. 유연성은 영에 가깝고 편견과 아집은 무한대로 수렴한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이 불편하다. “정말 보자마자 반말을 하더군요. 놀랐습니다.” 윤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는 한 기업인의 전언이다. ‘바이든-날리면’ 논란 때 ‘대안적 사실’ 설명보다 더 놀라운 것은 대통령 입에서 나온 ‘이 새끼들’이었다. 왜 쓰는지 모를 영어 단어도 특징이다. 윤 대통령 주요 일정 뉴스를 보면 ‘어그레시브’ ‘체인지 싱킹’ 등 굳이 필요 없는 짧은 영어들이 등장한다.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라고 하면 멋있는데 국립추모공원이라고 하면 멋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는 대통령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둘째, 남의 허물에는 추상같고 자신의 잘못에는 인자하다. 반성이나 염치가 없다. 그래서 부끄럽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전두환 미화’ 발언으로 논란이 되자 버티다 못해 찔끔 사과하고는 다음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애완견에게 사과를 주는 ‘사과는 개나 줘라’라는 의미로 해석될 조롱성 사진을 올린 바 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숱한 정책·인사 실패에도 진정성 있는 사과 한 번 없었다. 책임을 피하고 잘못을 덮는 데 급급했다.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한 이가 아들 학교폭력 문제로 물러나도 사과하지 않는다. 제1야당 대표를 잡겠다며 300번 넘게 압수수색을 하면서 본인 배우자의 주가조작 연루 의혹에는 침묵한다.

셋째, 나는 맞고 남들은 다 틀렸다는 식이다. 양보나 협치는 없다. 그래서 피곤하다. “한 시간이면 혼자서 59분을 얘기합니다. 다른 사람 조언 듣지 않습니다. 원로들 말에도 ‘나를 가르치려 드냐’며 화부터 냅니다.” 윤 대통령 대선 캠프 대변인을 지낸 이동훈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의 글이다. 절대 신임을 받는 ‘윤핵관’들이 윤 대통령을 어떻게 대할지 짐작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여당 전당대회에 거침없이 개입하고, 새 당대표가 뽑히는 행사장에 가서도 화합 같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등 반대 세력은 개혁 대상으로 몰고, 정부 요직에는 검사 친위부대를 앉힌다. 야당과는 대화하고 타협할 생각이 아예 없다. 집권 10개월이 지나도록 야당 대표와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넷째, 보기 싫은 현실은 외면한다. 힘들고 욕먹어도 공동체를 잘 운영해보겠다는 의지가 안 보인다. 관리나 통치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무책임하다. 지난여름 수도권에 기록적 폭우가 쏟아지던 날 윤 대통령은 일부 아파트가 침수되는 것을 보면서 그냥 퇴근했다고 아무 문제의식 없이 털어놨다. 지난해 핼러윈 축제 때는 용산 이태원 압사 참사로 159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장관도 경찰청장도 책임지지 않았다.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라며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요구는 외면한다.

운치와 염치가 있고 협치와 통치에 유능한 그런 대통령을 볼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완벽한 현실은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제발 다음 명절에는 술 취한 삼촌이 우리 집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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