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성’ 반도체 지원의 함의

김유진 워싱턴 특파원

예상대로 디테일했고, 예상을 뛰어넘어 노골적이었다.

미국이 반도체지원법(CHIPS Act)에 따른 보조금 지급 시 ‘국가안보 기여도’를 가장 중시할 것이라는 점은 예견된 바다.

김유진 워싱턴 특파원

김유진 워싱턴 특파원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은 보조금 신청·심사에 관한 세부지침 발표를 닷새 앞두고 한 연설에서 “(반도체법은) 근본적으로 국가안보 구상”이라고 말했다.

상무부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발표한 반도체법 보조금 지원 공고는 미국이 표방하는 ‘산업정책의 안보전략화’의 실체를 가늠하게 한다. 75쪽 분량의 문서는 미국에 반도체 생산시설 투자를 한 기업들에 대한 각종 요구사항을 담았다.

군사용 첨단 반도체 안정적 공급, 국방부의 반도체 생산시설 접근 허용, 초과이익 공유, 재무·생산 관련 상세 자료 제출, 보육지원 계획 마련…. 의무조항부터 우대나 권고, 고려 사항 등 요구의 수준은 각기 다르다. 이달 중 발표될 중국 투자 제한 ‘가드레일’ 기준이 그러하듯 결국엔 상무부와 개별 기업이 맺는 협약이 관건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보조금 지급 명목으로 여러 조건을 붙인 ‘구속성’(strings attached) 지원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미국이 반도체 보조금 규제를 까다롭게 만든 의도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미국 내 반도체 생산과 연구·개발에 무려 527억달러(약 70조원)의 보조금을 나눠주는 만큼 납세자 세금 보호 차원에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도 “기업에 비용을 전가한다” “반도체와 무관한 정책 의제 실현 수단”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해 10월 반도체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미국의 새로운 산업정책을 둘러싼 비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글로벌 경제를 ‘힘이 곧 정의’인 ‘자연상태’로 전락시킨다는 지적이 있지만, 이는 바이든 정부의 비전이 아닙니다.”

정말일까. IRA의 전기차 보조금 차별 조항에 자극받은 유럽연합(EU)은 ‘맞불’ 보조금 도입을 공언했다. 미국이 반도체 제조업 부활에 천문학적 자금을 투입하기로 하자 한국, 대만 등에선 산업 공동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2차 세계대전 전후 자유시장과 경쟁, 규범에 입각한 경제질서를 설계한 미국은 중국 등이 흐트러뜨린 ‘룰’을 다시 세우기보다는, 안보 고려를 내세워 ‘힘’을 투사하는 데 더 관심이 있어 보인다.

국제 개발협력에서 ‘구속성 원조’가 비판받는 까닭은 수원국 주민의 삶의 질 향상보다 공여국의 경제적 이익 확대라는, 본질에서 벗어난 목적을 앞세운다는 점 때문이다.

산업정책은 각 나라의 주권 사항이므로 미국의 ‘구속성 반도체 지원’이 본래 취지에서 어긋났다는 식의 비판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대미 투자금액의 5~10% 수준의 보조금과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지원 내용이 기업들엔 매력적인 조건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반도체법 보조금 심사 기준 발표 이후 더욱 자명해진 미국의 의도, 그리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국의 숨은 셈법을 간파하고 치밀하게 대응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미국 좋은 일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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