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 시인

길을 걷다가 한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웃으면 봄이 와요.” 메다꽂듯, 어깨를 얼어붙게 한 그 말로 인해 한동안 나는 제자리였다. 뒤돌아보니 아이가 환히 웃고 있었다. ‘복’을 잘못 발음해서 ‘봄’이라고 했다기에는 지나치게 한봄이었다. 봄의 정중앙을 겨냥하는 말이었다. 곳곳에 꽃이 피고 볕이 푸진 봄날이었다. 웃으면 봄이 온다니, 움츠러든 몸을 쫙 펴게 만드는 말이었다. 제자리여도 좋았다. 제자리라서, 그 말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곁에 있던 어른 중 그 누구도 아이에게 “웃으면 복이 와요”가 맞는 문장이라고, 봄이 온다고 표현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않음’이 좋았다. 덕분에 아이의 말은 그 순간에 안착할 수 있었다. 실언이었다고 해도 그 자체로 시 같고, 원래 갖고 있던 생각이 튀어나온 것이라면 아이는 봄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법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니까. 아이가 웃으며 봄 안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아이가 웃어서 봄이 성큼성큼 오고 있었다. 동심과 봄날은 짝꿍 같았다.

그때 “웃으면 왜 봄이 올까요?” 물었다면 아이는 뭐라고 답했을까. “기분이 좋잖아요”나 “따뜻해져서요”라고 답하지 않았을까. 상상은 제자리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머문 듯 보여도 사방팔방으로 생각이 뻗어나가는 시간이다. 씨앗을 심은 땅 위로 싹이 돋고 그 싹이 햇빛과 빗물을 양분 삼아 쑥쑥 자라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싹이 자라나 무엇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웃으면 봄이 온다고 말했던 아이의 미래를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것처럼.

이런 순간들을 일컬어 남몰래 ‘시앗’이라고 불러왔다. ‘시의 씨앗’을 줄여서 부르기 위해 혼자 만든 말이다. 혹시나 하고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시앗이라는 단어가 이미 있다. 그것이 “남편의 첩”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해서 화들짝 놀랐다. 시앗과 관련한 속담도 자그마치 여섯 개나 된다.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지만 하루빨리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단어니까 자의적으로 붙인 시앗의 좋은 의미를 널리 알리고픈 별쭝맞은 마음도 생긴다.

시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가 단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다. ‘먹다’라는 단어에서 ‘겁먹다’를 떠올린 뒤 ‘마음먹다’를 연결할 수도 있고, ‘기대앉다’라는 단어를 통해 ‘기대다’와 ‘앉다’가 얼마나 편한 상태인지 환기할 수도 있다. ‘더덜없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하며 더하거나 덜함이 없을 때 찾아오는 깔끔함을 맛보게 할 수도 있고, ‘햇덧’이라는 단어로 해가 더해주는 혜택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가만하다’와 ‘사뿐하다’를 둘 다 포함한 ‘가만사뿐’이라는 단어를 가만사뿐 발음해보는 즐거움도 시가 선사하는 즐거움이다.

동시에 시는 시대착오적인 언어의 뜻을 다른 방향으로도 돌릴 수 있다. 소수에게만 전유(專有)된 단어를 더 많은 이가 사용할 수 있게 전유(專有)할 수도 있다. 앞의 전유가 “혼자 독차지하여 가지다”란 뜻이라면, 뒤의 전유는 “식민지인의 관점에서 ‘되받아 쓰는’ 저항의 목소리로 다시 태어난다”란 뜻이다. 이는 생명력이 다한 말에 숨결을 불어넣는 일이거나 시대착오적인 단어에 새롭게 자랄 기회를 주는 일일 것이다. 시가 궁극적으로 벗어나는(脫) 일을 지향한다면, 그 출발점은 바로 사회에 만연한 편견과 고정관념, 차별과 배제일 것이다. 머릿속과 백지는 매일 그 탈출이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돌아오는 길, 웃으면 복이 오고 봄이 오는 것이 즐거워서 또 뭐가 오거나 될 수 있을지 가만사뿐 떠올려보았다. 웃으면 어수룩해서 이용해 먹기 좋은 사람인 ‘봉’이 되거나 특정 작업을 반복하는 ‘봇’이 될 가능성도 있지만, ‘볼’에 기꺼이 우물을 만드는 ‘본’보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상의 힘으로 제자리를 찾아가게 만드는 시앗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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