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의 과로와 가산임금 없는 강제 휴가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근로자의 정신 건강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추세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지만, 적어도 한 국가는 이를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한국의 주 69시간제 논란에 대한 미국 CNN 방송의 20일자 보도다. 호주 ABC방송도 지난 14일 과로사를 발음 그대로 ‘kwarosa’로 표현하며 관련 논란을 보도했다고 한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칠레에서 주당 노동시간을 45시간에서 40시간으로 단축하는 법안이 만장일치로 상원을 통과했고, 호주에서는 주 4일제를 시행하는 사례가 나왔다. 반면 우리나라는 지난해 연간 노동시간이 1915시간으로 OECD 장시간 노동 국가 5위에 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 69시간제 국가로 다시 한번 이름을 떨친(?) 셈이다.

주 52시간제를 완화해 달라는 요구가 재계의 오랜 주문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노동계 의견은 선택적으로만 청취해 핵심 이해당사자의 한 축이 배제되었다. 급기야 고용노동부가 ‘취약 청년 노동자’의 의견을 전달하겠다는 청년 노동단체 간담회 일정을 비공개로 전환하기까지 했다.

‘일이 많을 때는 일주일 최대 69시간까지 몰아서 하고 적을 때는 푹 쉬자’는 취지라고 정부와 여당은 거듭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약이나 운동도 몰아서 (복용)하면 오히려 몸에 해롭다. ‘푹’ 쉴 수밖에 없을 정도의 과로라는 것을 인정한 것과 진배없다. 역시 방점은 ‘푹 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몰아서 일(과로)하는’ 데 있다.

이정식 노동부 장관은 ‘정확한 표현은 주 69시간이 아니고 주 평균 52시간이 맞다’고 주장한다. 최대 69시간이든 평균 52시간이든 본질은 동일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주일 최대 69시간으로 연장 유연화된 한 달간 주 평균 52시간이다.

노동부의 입장은 ‘노동시간 연장이 아니라 현행 주 52시간 근무제의 틀을 유지하면서 연장근로 관리 단위만 유연화하고, 결과적으로는 총 근로시간을 감축한다’는 것이다. 맞는 얘기다. 그러나 이때 방점은 노동시간 단축이 아니라 노동시간 유연화에 있다. 주 최대 노동시간을 연장하는 유연화가 핵심이다.

정부안을 보면, 분기 단위 이상에서 연장 근로시간이 단축되는 것은 사실이다. 주 평균 연장 근로시간이 월 단위로는 12시간(총 52시간)이지만, 분기(3개월) 단위로는 10.8시간(총 140시간), 반기(6개월)와 연 단위로는 각각 9.6시간(총 250시간)과 8.5시간(총 440시간)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도 지속적으로 강조하듯이 월 단위가 선택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실제 노동시간은 주 단위로 크게 연장될 것이 분명하다. 둘 다 최대치인 69와 52 사이 혹은 최댓값 52와 평균값 52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간 노동시간이 연장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가산임금을 휴가로 지급하려는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도 그에 못지않은 독소 조항이다. 월 단위로 계산할 때, 연장근로시간에 따른 이른바 저축휴가 시간은 52시간에 가산임금 0.5(통상임금의 0.5배)를 곱한 값 26시간이다. 이를 일일 노동시간 8로 나누면 저축휴가일은 3.25일이다. 여기에 연·월차 휴가 최소 이틀을 더하면 일주 근로일인 5일을 넘는다. 3주 동안 연장근로 52시간을 모두 채우고 가산임금을 사실상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강제 휴가를 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분기 이상으로 가면 총 연장 근로시간이 줄어든다고 하지만, 동일하게 계산해보면 시간 저축으로 인해 휴가 일수는 점차 3주, 6주, 12주가량으로 늘어난다.

휴가 기간을 위해 기업은 비정규직을 고용할 것이고, 3주 동안의 기간도 연장 근로로 채워지므로 정규직 고용이 감축될 것이다. 결국 노동 형태의 유연화를 촉진해 비정규직 확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시간 주권이라는 명분으로 노사가 합의해 도입하고 근로자가 직접 선택하도록 한다고 하지만, 과연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되겠는가.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주 최대 55시간 넘게 일하면 허혈성 심장질환으로 사망할 위험이 17% 높고 뇌졸중으로 숨질 위험도 35% 높다. 미국 NBC는 한국의 일상화된 초과 근무를 보도하며, 이것이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로 이어진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OECD 국가들 중에서 가장 낮고, 자살률은 10만명당 26명으로 선진국 중에서 가장 높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되면 출산율은 저절로 높아지고 자살률도 줄어들 것이다. 일 부려 먹기 놓은 나라가 아니라 일하기 좋은 나라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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