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9일의 기억이 던지는 질문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10월29일 밤, 국가는 없었다.’ 지난 5월15일 발표된 ‘10·29 이태원 참사 인권실태조사 보고서’는 이런 문구로 시작된다. 이 문구는 실태조사에 참여한 생존자가 실제로 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0월29일 밤, 사람들 속에서 압박받으며 구조를 기다리던 그때, 그는 국가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참사를 예방하지 못했던 국가는 참사 당시에, 그 이후에도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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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공백을 메운 것은 시민들이었다. 참사 당시 희생자와 생존자를 돌보고 현장 수습과 구조활동에 함께한 구조자들이 있다. 참사 현장에서 신체적·심리적 부상을 입고 이후로도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그날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연대가 되어주는 생존자들이 있다. 참사로 상처받은 이태원 지역을 지키며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가족과 함께하는 지역 주민과 상인들이 있다. 참사 이후 200일 넘게 지난 현재도 진상규명과 희생자에 대한 온전한 추모를 바라며 침묵하고 있는 국가를 향해 외치는 유가족과 시민들이 있다.

‘10·29 이태원 참사 인권실태조사 보고서’는 참사 피해자 25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은 단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다. 보고서 제목 ‘10·29 이태원 참사, 인권으로 기억하고 존엄으로 다시 쓰다’처럼 피해자들이 어떠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했고, 그것이 왜 지켜지지 못했는지 국가와 사회, 언론 등의 책임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나 역시 실태조사에 참여해 몇분의 유가족과 생존자를 인터뷰하고, 보고서 작성에 참여하면서 이 부분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언어로 참사를 재구성하고, 그날의 진상을 밝히며 추모와 애도, 연대와 치유의 과정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피해자의 이야기는 참사를 고통으로만 남기지 않고 더 나은 사회로 연결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더 많은 피해자들이 서로를 만나고 연대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위로가 있잖아요”라는 생존자의 이야기, “사회적 재난이나 참사가 있을 때 정신적 치료나 심리 상담보다 유가족들끼리 만나는 게 진짜 중요하구나라는 걸 저는 느낀 것 같아요”라는 유가족의 이야기는 연대를 통한 사회적 치유와 회복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국회에 발의된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을 두고 여당 등에서는 이를 반대하며 피해자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지금 국회가 해야 하는 것은 많은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이들의 권리를 폭넓고 두껍게 보장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권리가 보장될수록 참사의 구조적 원인을 밝히고 재발을 위한 사회적 논의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도, 특별법의 피해자 권리 규정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난 7일부터 참사 유가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앞 농성을 시작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5월16일 ‘재난피해자 권리보호를 위한 인권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재난에 대한 지원은 시혜나 박애가 아닌 재난피해자의 권리이므로 재난관리 주체는 재난피해자의 권리 행사를 적극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참사 이후 200일 넘게 지난 지금, 책임지지 않는 국가로 인해 유가족이 거리로 나서고 생존자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은, 아직도 10·29 이태원 참사를 피해자의 권리로 다시 쓰고 기억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며칠 전 수내역 엘리베이터 역주행 사고처럼 재난 참사가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많은 이들이 묻고 있다. 참사 이후 우리 사회에 남은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기억하고 남겨야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10월29일을 경험한 우리는, 사회는,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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