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역사의 기생충’이 될 것인가

김택근 시인·작가

1987년 6월10일, 운명의 날이었다. 직선제 개헌을 거부한 전두환 정권은 민정당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었다. 간선제 선거로 ‘체육관 대통령’을 뽑겠다며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선출했다. 꽃가루가 쏟아지고 1만여명의 함성으로 잠실 실내체육관이 터질 듯했다. 노태우의 애창곡 ‘베사메무초’가 울려 퍼졌다. 같은 시각 대한성공회 대강당에서는 호헌철폐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대회장에 모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간부들은 소수였다. 국본은 옥외방송을 내보냈다. 비장한 목소리가 하늘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의 이름으로 지금 이 시각 진행되고 있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김택근 시인·작가

김택근 시인·작가

그날 오후 6시, 길 위에 있던 차량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깨어난 시민들의 약속된 행동이었고 무도한 정권을 향한 경고음이었다. 도심으로 시위대가 돌진했다. 그 속에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섞여 있었다. 이른바 ‘넥타이부대’였다. 전두환 정권은 최루탄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마침내 신군부 세력이 백기를 들었다. 바로 ‘6·29선언’이다. 그렇게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다.

붉고 고왔던 6월을 기억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최루탄 가스에 눈물을 흘렸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꿈처럼, 기적처럼 피어난 민주화의 희망에 눈물을 흘렸다. 6월 민주항쟁은 그렇게 우리 모두의 것이다. 국민들은 8차례나 직접선거를 치러 대통령을 뽑았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직선제를 쟁취하지 않았다면 기업인 이명박,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는가. 또 국가안전기획부의 위세에 눌려 숨도 못 쉬던 검찰이 막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막 검찰총장에서 물러난 윤석열이 일거에 대권을 움켜쥘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한국 정치는 6월 민주항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올해 6·10민주항쟁 기념식에 정부 인사들이 불참했다. 2007년 국가기념일로 제정한 이후 처음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윤석열 정권 퇴진’을 구호로 내건 행사를 후원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윤석열 정권은 시원과 근본을 팽개쳤다. 그럼에도 야권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언론 보도 또한 미지근했다. 이는 진영논리에 갇혀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이처럼 ‘엄연히’ 분열되어 있다.

속이 좁은 옹졸한 처사였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는 윤석열 정부의 ‘계산된 이탈’일 것이다. 국민의힘은 ‘5공화국 청산’ 이후 새롭게 출발했던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그 뒤에는 여전히 박정희와 전두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끊임없이 독재자들을 끌어들여 표(민심) 관리를 해왔다. 민주당 또한 이를 부각시켜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지금 한국 정치는 거대 양당이 적대적 공생을 하며 1987년 체제에 머물러 있다. 과거는 흘러가지 못하고 미래는 오지 않고 있다. 정치평론가 김욱은 최근에 펴낸 <민주화 후유증>에서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민주화를 이룬 지 벌써 수십여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적대적 공생’이라는 민주화 후유증을 앓고 있다. 좀 더 명확하게 개념적으로 구체화하면, 이 ‘민주화 후유증’이란 우리나라 민주화는 10여년(1987~1997)에 걸친 타협적 민주화였고, 그로 인해 냉전적 파시스트 세력과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권 세력을 민주적인 헌법이념으로 청산 못했으며, 그 결과 그 세력들이 퇴행적·위선적인 강성 이데올로기로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함으로써 저강도의 적대적 공생체제가 무기한 연장된 채, 정상적인 민주체제의 발전이 만성적으로 저해되고 있는 사태를 의미한다.”

적대적 공생체제는 서로를 공격하며 다른 세력이 끼어들 틈을 내주지 않는다. 유권자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린다. 지금 정치권은 여론에 떠밀려 선거제 개편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저들은 비례대표제를 개선한다면서 위성정당을 띄웠다. 시늉만 내고 다시 적대적 공생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짐작건대 모든 검찰의 총구는 총선을 겨누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정치권은 다시 적대적 공생을 할 것이다. 그럴 경우 윤석열 열차는 국민의힘과 민주당, 두 레일 위를 거침없이 폭주할 것이다. 김욱이 표현한 대로 ‘민주화 역사의 기생충’이 될 것인가. 걸핏하면 국민들을 들먹이는 당신들에게 6월의 국민들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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