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자연현상, 동일한 자연법칙서 비롯한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다양한 자연현상, 동일한 자연법칙서 비롯한다

“딱 하나로 정해진 중력법칙을 따라 행성 지구가 태양 주위를 오랜 시간 공전하는 동안, 정말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이토록 아름답고 경이로운 온갖 다양한 형태의 생명이 진화했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는 이렇게 내가 옮겨 본 유명한 마지막 부분이 있다. 어쩔 수 없는 물리학자인 나는, 고정된 중력법칙과 생명의 다양성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다윈의 통찰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현상의 다양성은 자연법칙의 단순한 동일성과 함께한다. 같아도 다를 수 있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같지만 다른 예가 많다. 풀잎 위 빗방울은 둥근 구슬로 구르고, 쏟은 물은 바닥에 넓게 퍼진다. 크고 작은 물 덩이의 다른 모습은 물리학의 에너지가 정한다. 작은 빗방울의 모습은 중력이 아닌 전기력이 정한다. 표면적이 작을수록 에너지가 더 낮아 빗방울은 둥글게 뭉쳐 구른다. 커다란 물 덩이의 모습은 전기력이 아닌 중력이 정한다. 지면에 가까울수록 에너지가 더 낮아 쏟은 물은 납작 엎드려 바닥에 퍼진다. 정확히 같은 전기력, 정확히 같은 중력이 작용해도 물 덩이의 크기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된다. 똑같은 물리학이 물 덩이의 다른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똑같은 진화의 법칙이 작용해도 실로 다양한 생명이 만들어진다. 다양한 자연현상이 동일한 자연법칙에서 비롯한다.

생물학의 유전적 부동의 부동(浮動)은 부동산의 부동(不動)이 아니다. 시냇물 위 나뭇잎이 둥둥 떠(浮) 휘휘 움직이는(動) 것처럼, 집단 내 유전자의 빈도가 변하는 것이 유전적 부동이다. 생존에 유리한 형질을 표현하는 유전자가 선택되는 것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다. 유전적 부동은 다르다. 생존 가능성에 차이가 없어도 유전자 빈도의 시간 변화를 만들어낸다.

흰 돌, 검은 돌, 색깔만 다른 바둑알이 각각 10개씩 담긴 주머니를 생각해보자. 바둑알 하나를 마구잡이로 꺼내, 같은 색 하나를 보태 두 개를 다른 빈 주머니에 넣자. 이 과정을 10번 반복해 바둑알 20개가 담긴 두 번째 주머니를 채우자. 이를 또 여러 번 되풀이해 세 번째, 네 번째 주머니로 이어가보자. 마지막 주머니의 속사정은 어떨까?

눈 질끈 감고 하나를 꺼내 같은 색 둘을 다음 주머니에 담는 과정은, 우연에 의해 선택된 개체가 다음 세대에 두 개체의 자식을 낳는 과정에 해당한다. 이때, 희고 검은 색에는 생존과 생식 확률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어쩌다 우연히 주머니에서 흰 바둑알이 검은 바둑알보다 손에 몇 번 더 잡혔다면, 다음 세대 주머니에는 흰 바둑알이 더 많아진다. 최종 주머니에는 흰색만 가득 들어 있을 수도 있다. 색에 따른 생존 확률의 차이가 없어도, 유전적 부동이 집단 내 유전자 빈도의 시간 변화로 이어져 진화를 만들어낸 셈이다.

자연선택은 다르다. 아무 바둑알 하나를 눈 질끈 감고 고르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만약 흰색이면 바둑알 하나만, 검은색이면 두 개를 두 번째 주머니에 담는 실험을 생각해보자. 여러 번 이어가면, 결국 검은색 바둑알만 가득한 주머니가 등장한다. 희고 검은 차이에 따라 자손의 개체 수가 달라지는 자연선택의 원리다. 자연선택과 유전적 부동은 집단 내 유전자의 빈도 변화를 마찬가지로 만들어내지만, 유전적 부동은 표현형의 차이에 눈감는 중립선택이다. 유전적 부동이 생물 종을 멸종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어쩌다 등장한 흰색만 담긴 주머니가 검은색만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에 놓이는 경우다. 이때 다음 세대는 바둑알이 멸종해 텅텅 빈 주머니가 된다.

유전적 부동은 집단의 크기가 작을 때 강해진다. 바둑알 100만개로 같은 실험을 진행하면, 한 색깔이 주머니를 가득 채우는 상황을 보기 어렵다.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물리학자의 눈에, 유전적 부동은 크기가 작을 때 드러나는 물리학의 유한 크기 효과(finite-size effect)다. 또, 한 색깔이 주머니를 가득 채우면 이후에는 아무런 변화 없이 같은 속사정을 가진 주머니가 계속 이어지는 생물학의 유전적 고정(genetic fixation)은,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통계물리학의 흡수상태(absorbing state)다. 유전적 부동이 일으키는 유전적 고정을 생물학이 말할 때, 물리학은 유한 크기 효과가 일으키는 흡수상태를 본다. 물리학과 생물학은 같은 자연을 바라보는 결 다른 시선이다. 같아도 다르고, 달라도 같은 것이 자연과 과학의 참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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