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케티의 계급투쟁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최근 번역 출간된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에는 저자가 재직 중인 대학을 방문한 토마 피케티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한 대학원생이 피케티에게 왜 계급투쟁보다 조세제도를 강조하는지 묻자 그는 조세가 바로 계급투쟁의 한 형태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꽤나 급진적인 학생의 도발적 질문에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적 측면 중의 하나를 정확하게 지적함으로써 응수한 셈이다.

피케티가 누구인가? 베스트셀러 <21세기 자본>을 통해 공개한 불평등에 관한 연구로 학계는 물론 대중적으로도 스타가 된 프랑스 경제학자. 그 인기에 힘입어 2014년 한국을 방문하여 특급호텔에 모인 수백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했던 인물이다. 영어를 제외하면 번역본이 가장 먼저 나올 정도로 선진국 따라잡기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한국에서, 피케티를 초청한 주체는 경제철학에 있어서는 대척점에 놓인 언론사였다. 해당 매체에서는 피케티에게 유도신문에 가까운 질의를 통해 한국에서는 부자증세 못지않게 성장이 소득격차 해소를 위한 방법이라는 엉뚱한 답변을 끌어내 보도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국적 열광의 대상이었던 피케티의 새로운 에피소드를 읽으며 다시금 한국으로 눈을 돌려본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올해 종합부동산세 규모는 2005년 제도 도입 이래 가장 큰 폭으로 줄어 세수로는 2조원 이상, 과세대상자로는 지난해의 130만명가량에서 최소 30만명 이상 감소할 것이라고 한다. 어림잡아 국내총생산의 약 0.1%가 줄어든 셈이며, 자산에서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인 한국 상황을 감안하면 자산보유 순으로 최상위 100만명 남짓에 속하는 이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감세 조치가 이루어진 셈이다. 보고 들은 것이 적은 탓인지 모르겠으나, 세금 감면의 효과가 사회 전체의 형평성은 제쳐놓더라도 경제에 미치는 기술적 영향, 심지어는 성장이나 효율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서조차 상세한 분석이나 논쟁이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연전의 소득주도성장 논쟁에서 그 입장의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최저임금 인상의 효과를 둘러싼 수많은 경제학자들의 비판이 어지러이 날아들던 것을 상기한다면 신기할 지경이다.

과연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경제학회들은 이른바 부자감세에 대해 철저하게 객관적인 경제이론 혹은 자유시장경제적 신념에 근거하여 동의하기 때문에 조용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언론지형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이른바 좌파적 정책에 대한 반응과는 달리 명시적·암묵적인 동의만 보도되는 것일까? 그런데 정작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던 이들이 오히려 언론 환경을 “평평하게” 만드는 기동전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또 왜일까?

정치가 경제를 잡아 삼키고 정치보도가 경제보도를 빨아들이는 시대, 어쩌면 한편에서 피케티가 말하는 계급투쟁이 조용히 진행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기 위한 홍보와 이데올로기 전쟁만 난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유주의와 밀턴 프리드먼을 운위하던 정부에서 자행되는 국가주의적 경제운영, 어김없이 몇십조원이라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계산이 따라붙는 엑스포의 경제적 효과 계산, 이코노미석을 타는 경제권력의 소탈한 모습이나 정치권력의 “세일즈”를 위한 강행군으로 보도되는 화면 뒤편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일까?

말보다 행동이 더 크게 말한다는 격언은 이 경우에도 타당하다. 북한의 도발에 대한 철저한 보복이나 파멸 예고로 응수하는 고위 국방권력자들이 국회에 출석하였을 때나 심지어는 미사일이 날아든 날 주식거래를 했다는 혐의를 받는 희극적 현실은 적어도 미사일보다는 금융자산거래의 손익계산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입증해 준다. 내년 봄의 총선, 그리고 다시 그 후에 펼쳐질 대선 준비에 이르기까지, 무협지 같은 정치인들의 권력 다툼이 우리의 눈을 가리는 사이에 기득 권익의 확장은 그렇게 조용히 이루어지리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피케티는 전작보다 훨씬 더 직설적이고 과격(?)해진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역시나 이데올로기가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누군가의 물질적 이익을 확보하고 유지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21세기 자본>의 마지막 구절로 돌아가야 한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숫자를 다루기를 거부하는 것이 가난한 이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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