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검열 광풍’ 조짐에도 알맹이 빠진 유인촌과의 대화

홍경한 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가 10월5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굳은 표정으로 질의를 듣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가 10월5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굳은 표정으로 질의를 듣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문화예술계와의 회합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0월23일 영상콘텐츠업계 관계자들과의 첫 만남 이후 무용계, 문학계, 저작권계, 만화·웹툰 산업 종사자들과의 의견 청취 시간을 잇따라 가졌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필요한 정책을 수립하겠다는 취지다.

지난 21일엔 미술계 인사들과도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미술인들은 미술대전 개최 비용 지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요구사항을 내놨다. 미술자료집 발간 지원, 비평 매체의 원고 번역 지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우회 진입로 신설 등도 거론했다. 유 장관은 “가능하다” “싹 다 바꾸겠다”며 호응했다.

그러나 알맹이는 빠졌다. ‘윤석열차’ 사건 이후 다방면에서 불고 있는 ‘검열 광풍’ 조짐은 논제로 떠오르지 못했으며, 표현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 침해, 문화예술인 탄압 중단 등도 논의 밖에 뒀다. 내년도 문화예술 관련 예산의 대폭 삭감에 대한 비판이나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라는 메시지도 없었다. 특히 과거 자행된 ‘블랙리스트’ 관련 사안조차 누락된 채 우리 집 수도꼭지가 고장 났으니 수리비용을 대달라는 수준의 의견만 오갔다.

지난 1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20부는 2017년 문화예술인들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 정부, 국정원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해 피해자들에게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이명박 정부가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지원배제명단을 조직적으로 작성·관리했으며, 좌편향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퇴출·견제활동을 지시했다고 봤다.

이로써 이명박 정권에 의해 작성된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실존했음이 약 6년 만에 입증됐다. 당시 문체부 장관이었던 유 장관의 블랙리스트 연루 의혹 역시 더욱 명징해졌다. 비록 원고들은 그를 증거불충분으로 피고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2008~2011년 이명박 정부 재임 시절 문화예술인들에게 부당한 피해를 광범위하게 입힌 사실은 명백해졌다.

그럼에도 유 장관은 여태껏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시인한 바 없다. 10월5일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물론, 최근 진행된 문화예술인들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27일 문학계와의 만남에선 “제대로 필요한 곳에 지원할 수 있도록 ‘선별하고 고르는 과정’도 국가 경영 입장에선 꼭 필요한 부분”이라며 문화예술에 관한 공권력 개입을 시사해 논란을 낳았다.

그는 8월28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좁은 문을 만들어 (예술가들을) 철저히 선별해야 한다”고 했다. “나랏돈으로 국가 이익에 반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말이 되나”라며 예술과 검열에 대한 이념적 잣대를 뚜렷이 했다. 이는 공공지원을 볼모로 예술가들을 길들이겠다는 것으로, 윤석열 정부가 입만 열면 내뱉는 ‘공산전체주의’이자 파시즘적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발언 자체가 ‘성향이 곧 국가이익’의 기준이라는 극단적 편협함을 내포하며,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 훼손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이명박 정부에 실존했다는 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인 22일, 문화운동단체인 ‘문화연대’ 등은 성명을 내고 유 장관의 파면을 요구했다. 이들은 “(블랙리스트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던 유 장관의 발언이 법원 판결로 거짓임이 밝혀졌다”며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유인촌 장관을 당장 해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술계를 포함한 문화예술계 역시 유인촌을 대면한 자리에서 “당신의 문화 독재적 사고에 반대한다”고 했어야 했다. “지금도 ‘블랙리스트’가 없었다고 주장할 거냐”고 물었어야 했다. 그리고 반성과 사과부터 주문하는 게 순서였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분야에서 느끼는 결핍만 읊었다. 답답한 일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홍경한 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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