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혐오의 시대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가성비’가 익숙해지는 듯싶더니 그새 ‘가심비’가 찾아왔다. 가격이 비싸더라도 심리적으로 만족도가 높다면 기꺼이 지갑을 열 수 있다. 한동안 TV와 유튜브 광고에 ‘명품 거래 플랫폼’들이 넘쳐나던 때가 있었다. ‘리셀’(재판매)을 통한 수익 목적도 있지만 명품이 주는 ‘가심비’의 역할이 컸다.

지금은 ‘시성비’가 뜬다. 가격도 중요하지만 하루 24시간으로 제한된 ‘시간’도 아껴야 하는 재화다. 시간 대비 성능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경쟁은 일상이 되고, 자기계발이 의무가 된 시대에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고 아껴야 한다. OTT와 유튜브가 익숙해지면서 ‘봐야 할 것’들이 넘쳐난다. 내 시간을 아끼려면 제대로 된 걸 골라야 한다.

‘시성비’의 시대 영상 소비 패턴은 2가지로 압축된다. 빨리감기와, 미리보기다. 2배로 빨리 보거나, 아니면 봐야 할 영상을 잘못 골라 시간을 날리느니 ‘요약본’으로 대표되는 미리보기를 통해 시성비 높은 선택을 하겠다는 의지다.

시성비가 주목을 받는 것은 단지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당위와 의지 때문만이 아니다. 시성비의 배경에는 ‘실패’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이 존재한다.

‘수능’으로 대표되는 치열한 입시경쟁은 사실상 ‘실수하지 않기’의 경쟁이다. 잘못된 선택은 곧장 낭떠러지로 밀리는 공포를 가져온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자칫 다른 의견을 냈다가는 조리돌림을 당하기 일쑤다.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에서는 ‘늘 옆사람을 보는 시대’라고 정의했다. <오징어 게임>의 유리계단처럼 한 번의 실수 없이 계단을 골라야 ‘생존’이 가능하다.

이런 강박은 ‘실패 혐오’로 이어진다. “실패해도 괜찮으니 일단 해보라”는 조언은 ‘괴롭힘’에 가깝게 느껴진다. 실패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온갖 애와 떼를 써야 하는 대한민국은 실패 혐오의 시대를 지나는 중이다. 출생률과 부동산 등 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다.

정치 역시 실험과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용산 대통령실은 여전히 ‘무오류의 신화’에 집착하고 여당 지도부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를 실패로 인정하지 않았다. 야당 역시 ‘승리’를 이유로 선거법 관련 공약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 단 한 번의 실패,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멘탈리티 속에서 반성은커녕 도전도 이뤄질 수 없다. 이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과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반성이 나오지 않는다. ‘실패’를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LG가 우승했다. 1994년 이후 29년 만의 우승이었다. 팬들이 감격했던 건, 앞선 28번의 실패 때문이었다. LG 염경엽 감독에게 우승 비결을 물었다. “전적으로 앞선 실패들 덕분이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염 감독은 선수로서 실패에 가까웠다. 통산 타율이 겨우 0.195였다. 프로야구 통산 1500타석 이상 타자 358명 중 꼴찌다.

감독이 됐을 때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마지막 고비마다 주저앉았다. 히어로즈 감독이던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 졌고, 2019년 SK 감독으로 9경기차 앞선 1위였다가 역전을 허용하는 바람에 우승에 실패했다. 2020시즌 도중에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경기 중 쓰러지는 일도 있었다.

그 실패들이 쌓여 우승의 밑거름이 됐다. 염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는 동안 과거 실패를 돌아봤다. 단순함과 과감함을 키워드로 삼았다”고 말했다. 과거 염 감독은 실패를 않기 위해 ‘준비’에 ‘준비’를 더하는 스타일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5~6가지 대안을 미리 고민해뒀다. “실패에 대한 대비와 고민이 너무 많았던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이번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면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시나리오를 2개로 줄였다. ‘단순함’이다. 선택의 폭을 줄여둔 덕분에 공격적이고 과감한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염 감독은 “예전에는 선택지가 많아 타이밍을 놓치는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승부의 흐름을 바꾼 2차전 1회초 투수교체는 선택지를 줄여놓은 다음 과감하게 결정한 덕분이었다.

29년의 기다림을 고려하면 LG로서는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는 한국시리즈였다. 염 감독은 오히려 과거 실패들을 거름 삼아 실패의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우승을 일궜다. ‘실패 혐오’라는 중력을 탈출하기 위한 초속 11.2㎞의 힘은 거꾸로 실패를 인정하고, 이를 통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나아지는 길이다.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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