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본 대지진과 죽음에 대한 단상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2011년 3월11일 나는 학업을 위해 도쿄에 있었다. 수업이 한창일 때(오후 2시46분) 갑자기 15층 건물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살면 으레 경험하는 일상적 미진이 아니라, 굉음이 들릴 정도로 건물 바닥과 외벽이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인 동료들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니, 그들도 당황한 건 매한가지였다. 이내 사이렌 소리가 이어지고 건물 밖으로 대피하라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던 학생들이 가방을 챙길 새도 없이 서둘러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지진 경보가 울리면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없어 계단을 통해 대피해야 했다. 강의실은 11층이었고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건물이 몇번이나 크게 흔들렸다. 그때마다 학생들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거나 아예 난간을 붙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다 좀 잠잠해지면 중심을 겨우 잡고 서로를 붙들고 의지하며 내려가다 큰 진동이 다시 오면 멈춰 서길 반복했다. 이러다 오늘 정말 잘못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 사이 지진이 잦아들자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 겨우 한 층씩 내려와 건물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건물 밖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금방이라도 폭우가 내릴 듯이 짙은 구름이 몰려들었다. 도쿄 상공에는 공항에 착륙하지 못한 대여섯 대의 민항기들이 원을 그리며 선회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자위대 헬기가 가로지르면서 어딘가로 빠른 속도로 비행하고 있었다.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과 같아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전화는 먹통이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괴이한 소문만 재빠르게 퍼져나갔다. 도쿄만에 해일이 일어나서 디즈니랜드의 첨탑이 잠겼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도쿄 지하철은 모두 운행을 중단해 숙소까지 걸어서 가야 했고, 밤새 여진은 계속되었다. 이것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날에 대한 기억의 파편들이다. 그날은 또한 내 삶에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준 날이기도 하다.

올해 3월로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지 13주기가 되었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의 상처는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아물지 않고 남아 있다. 사망자만 해도 2만여명(실종자 포함)에 달하고 재산 피해 규모도 17조원에 이른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도 세계 각지에서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는 물론 전쟁과 군사적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하고 있다. 때론 내 삶의 터전이 전쟁터나 재난지역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부끄러운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재난지역이나 전쟁터도 그 직전에는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애초부터 재난지역과 전쟁터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듯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삶 속에는 항상 죽음이 함께한다.

“사람의 목숨은 얼마 사이에 있는가?” 2500여년 전 붓다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제자들의 대답은 가지각색이었다. “며칠 사이에 있다”부터 “밥 먹는 사이에 있다”는 대답까지 모두 정답이 아니었다. 그중 한 제자가 답한다. “한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그제야 붓다는 칭찬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다름 아닌 한 호흡 사이에 있으며 한 번 들이마신 숨이 내쉬어지지 않는 것이 곧 죽음이라고 설한다(<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이처럼 죽음은 삶 이후에 선형적으로 찾아오는 게 아니라 삶 속에서 공존한다. 들이마신 숨과 내쉰 숨 사이에 삶과 죽음의 경계가 자리한다. 결국 삶과 죽음 사이엔 경계라 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죽음을 나와는 별개 문제 혹은 먼 미래 일로 여긴다. 여전히 가자지구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등지에선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다.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죽음은 단순 수치로 치환되고 뉴스 데이터로 소비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차츰 죽음에 둔감해지거나, 냉담해지기까지 한다. 수많은 희생자의 끔찍한 죽음만큼이나 섬뜩한 것은 그 죽음을 나타내는 상징들에 무뎌져가는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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