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승만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의 흥행과 열린송현광장의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둘러싼 논쟁 소식에 아연실색했다. 수구세력은 기회가 되면 언제든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다. 헌법은 명백히 이 나라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숱한 민중의 피와 눈물을 뿌리며 여기까지 왔음에도 그들은 정의의 역사를 왜곡, 전복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 삶을 옥죄는 환경은 이승만 독재 권력이 켜켜이 쌓아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의 정신적 퇴행성은 이 나라를 기독교민족주의로 재건하고자 했던 점이다. 경성감옥에서 기독교를 믿게 된 그는 1904년에 쓴 <독립정신>에서 한국인들을 기독교로 교화시키고, 한국이 영국·미국처럼 기독교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기독교 구국론과 신국 건설이 그의 존재 이유이자 필생의 사명이 되었다. 미군정의 친기독교 정책을 계승한 그는 성탄절 공휴일화·기독교 군목제도·국영방송국의 선교 등을 통해 신정국가를 지향했다. 1952년, 1960년 대선 때 조직적 선거운동을 한 기독교는 권력 유지 기반이었다. 이는 ‘제헌헌법’ 12조 “국교는 존재하지 아니하며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된다”는 정교분리 원칙 위반이다.
다음은 반공을 국시로 삼아 남북 및 남남으로 백성을 분열시켰다. 남북 분단은 외세 탓인데도 미국의 반공노선을 추종, 남한만의 반쪽 정부를 구성했다. 그가 등용한 친일파들은 반공주의로 전향, 면죄부를 받았다. 제주 4·3과 여수·순천항쟁 때 ‘빨갱이’를 몰살시키도록 하고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1959년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조봉암을 법살(法殺)했다. 국민보도연맹원과 양민 학살 수는 100여만명. 한국전쟁 중 백성을 내팽개친 이승만은 1953년 군사주권을 미국에 무조건적으로 양도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 이 땅을 미군의 무법천지로 만들었다.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이자 백성들을 훈육하고 인도하는 종교 지도자, 즉 메시아였다. 그의 언설을 추종한 기독교는 반공 신학을 창안했다. 이후 군인정치가들의 권력 토대도 반공에 의한 흑주술이었다. 그의 북진통일론은 전시국가를 연장하고, 반공 교육과 훈련으로 백성들이 자기검열을 하게 했다. 권력은 독점되었다. 나아가 친미를 통해 미국은 성스러운 땅이며, 그곳에서 문명의 세례를 받는 것이야말로 구원임을 믿게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인들을 교육시켜 충량한 일왕의 신하로 만들고자 했던 전략을 미국은 거저 얻었다. 미국행은 지배계급을 향한 사다리이며, 학위는 계층상승의 보증수표다. 미국식 정치·교육·의료·사회시스템은 신국의 문명이다. 미국의 가치는 세계 보편적 진리다.
자유민주주의의 원조는 이승만의 자유론이다. 조선인이 미개해서 식민강권통치와 분단을 맞게 되었다. 그러니 부패한 전통에서 해방되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는 영국·미국의 민주제를 심자고 했다. 하지만 대영제국은 퇴락했고, 군사력으로 세계 모든 곳에 이권 개입을 해온 미국의 야만적 실체는 벗겨지고 있다. 미국식 자유는 욕망의 자유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이승만의 죄는 반민특위가 그에게 짓밟혀 민족반역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한국의 주류로 탈바꿈하게 한 사실이라고 한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와이로 도망가기 전, 미국 대사가 대통령직을 내려놓으라 종용한 사실을. 그는 미국이 쓰다버린 소모품에 불과했다. 독재자의 말로는 하야는커녕 추방이었다.
열린송현광장은 일제강점기 수탈의 본거지인 식산은행 사택, 해방 후엔 점령군인 미군 숙소, 그리고 내정간섭을 해온 미대사관 직원 숙소 터였다. 여기는 이승만이 희생시킨 애달픈 영혼들의 안식처가 되도록 나무를 심어 산 자들과 함께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기념관 건립은 캄보디아의 폴 포트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기념관을 그 나라의 수도에 세우는 것과 다름 없다. 다시는 이승만 망령이 이 땅을 배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