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들한테 얻어먹지 말라 하셔서 제가 샀습니다.” 하헌수 라이더유니온 조합원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옆에 있던 동료가 거들며, 하 조합원이 사장들을 만나러 다니며 쓴 밥값이 20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1년 전 지역 배달대행사 사장들이 건당 임금을 1300원 삭감하자 하헌수 라이더는 동료들을 모아 노조를 만들고 지역의 모든 배달대행사에 단체교섭을 요청했다. 단체교섭이라는 말을 생전 처음 들어본 사장들은 하헌수를 무시했다. 설득이 안 되니 집회와 투쟁을 시작했고, 노동위원회에서 부당노동행위 판정까지 받고 나서야 교섭테이블이 열렸다. 꼬박 1년이 걸렸다.
동네에서 얼굴 보고 일하는 사장과의 교섭은 쉽지 않다. ‘칼 맞지 않게 조심하라’는 협박도 받지만, 소고기 접대를 받을 수도 있다. 이를 우려해 사장한테 커피 한 잔 얻어먹지 말라 했더니 자기가 사버린 것이다. 흩어져 일하는 라이더들을 모으려 동료들의 밥과 커피도 샀다. 그는 단결과 조직이 어려운 플랫폼 노동자의 한계를 초인적 노력으로 극복하고 있다. 인간의 의지는 한계가 없을지 모르나, 통장은 한계가 있다. 결국 대출을 받았다. 차비를 털어 굶주린 동료에게 풀빵을 사주고 12㎞의 거리를 걸었던 전태일이 떠오른다. 오토바이를 탄 하헌수는 밤이슬을 맞으며 하루 200㎞ 이상 달리고 있다. 빚까지 지면서 이루고 싶었던 그의 소망은 소박하다. ‘마음대로 35%의 임금을 삭감하지 말라. 계약서는 쓰고 일하자. 배달 노동자가 폭언폭행을 당하면 사장이 도와 달라.’
최근 전태일재단은 조선일보에 ‘민주주의는 공기처럼 일상화됐고,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할 권리도 보장되고 있다’고 썼다. 그러나 하헌수의 동료들은 노조를 한다는 이유로 앱이 막히고, 카톡방에서 추방되었으며, ‘너 때문에 회사가 망한다’는 협박을 듣는다. 전태일재단과 조선일보는 전태일을 분신이나 투사로 호명하던 시기는 지났다고도 했다. 틀렸다. 분신을 하면 온 국민이 분노했던 시기가 지났다. 전태일재단이라면 노동자가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냉정한 세상을, 젊은 청년 노동자의 가슴 아픈 서사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오피니언 리더들을, 전태일을 계승하고 있다고 자임하는 사람들 옆에 전태일이 없는 현실을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택시회사의 불법경영과 노조탄압에 분신으로 항거한 방영환 열사는 아직까지 경영진의 사과를 받지 못했다. 주일을 맞아 노조에서 회사 책임자가 장로로 있는 교회 앞에서 피켓을 들었다. 대다수 교인이 응원해주셨는데, 단 한 명의 교인이 피켓을 든 내 앞에 서서 왜 교회에 피해를 주냐고 따졌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소와 양,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내쫓는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돈을 쏟고 상을 엎으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외쳤다.
예수님은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있는 자의 얼굴로 온다고 한다. 전태일도 전태일의 얼굴로 오지 않는다. 하헌수의 얼굴로 방영환의 얼굴로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노동자의 얼굴로 온다. 전태일을 기념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거리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