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고려대 호랑이상

김찬휘 녹색정의당 공동대표

4·19혁명 도화선 된 ‘민족고대’의 기상

고려대 호랑이상 1971년(왼쪽)과 2024년 |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고려대 호랑이상 1971년(왼쪽)과 2024년 |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4월18일은 1960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려대 4·18 시위가 일어난 날이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은 각지의 자연발생적 시위로 폭발했는데, 특히 마산이 가장 격렬했다. 경찰의 폭력 진압과 발포로 9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4월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의 마산상고 합격생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에 떠오르자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보기 위한 동공 대신, 생각키 위한 슬기로운 두뇌 대신, 포탄이 들어 박힌 중량을 아시는가?”(유치환, ‘안공에 포탄을 꽂은 꽃’)

이런 국민적 저항의 흐름이 4·18로 이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4·18을 이해하려면 사진 속 호랑이를 상징으로 하는 고려대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대는 1905년 우리나라 사람이 설립한 최초의 민간 고등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로 시작되었다. 경성제국대학으로 시작된 서울대나, 선교사가 설립한 연세대, 이화여대 등과 다른 고려대의 기원은 ‘민족고대’ 구성원의 남다른 자부심을 형성했다.

특히 동아일보 창업자인 김성수가 1932년 보성전문을 인수했는데, 김성수는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을 창립했으며 한민당은 민주국민당을 거쳐 1955년 민주당으로 이어졌으니, 이것이 더불어민주당의 뿌리이다. 민국당-민주당은 이승만의 자유당과 대립한 제1야당이었으니, 당시 고려대와 동아일보의 성향도 김성수를 연결하면 쉽게 이해된다. 실제 4·18 당일 시위의 신호가 “인촌(김성수의 호) 동상 앞으로!”였다. 게다가 당시 고려대 총장은 제헌헌법 초안을 만든 유진오였는데, 훗날 그는 신민당 총재를 지낸다.

한민당은 반공의 보루였고 김성수와 유진오는 친일 행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4·18과 4·19의 근본적 한계를 가늠할 수 있다. 혁명 후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혁신계인 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이 미미한 성과밖에 얻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우리 고대는 (…) 해방 후에는 (…) 멸공전선의 전위적 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하겠다.”(4·18 선언문)

22대 총선이 끝났다. 수구보수 정권에 대한 심판은 중도보수 야당들의 압도적 승리로 귀결되었고, 중도보수 주도의 연합에 참여하지 않은 진보정당들은 참패했다. 4·19의 성격이 제5대 총선 결과를 규정했듯이, 제22대 총선도 여전히 ‘탄핵촛불’의 자장 안에 있었다. 그런데 저항의 수준이 상대 수준만큼만 발전한다면, 저항은 어떻게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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