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한 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예술의 역사에서 ‘사과’만큼 인기 있는 소재도 드물다.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그들이 남긴 작품 중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을 법한 것들도 적지 않다. 사과 세 개(각각 정숙·청순·사랑을 뜻한다)를 쥔 여신을 그린 라파엘로의 ‘삼미신’을 비롯해, 최초의 정물화로 꼽히는 카라바조의 ‘과일바구니’,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사과로 얼굴을 가린 마그리트의 ‘사람의 아들’, 입체주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통용시킨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등이 그렇다.

사과에 관한 한 진심인 작가도 있다. 바로 100점이 넘는 사과작품을 남긴 폴 세잔이다. 살아 있는 지각을 강조한 그는 오랜 시간 서양 회화사를 지배해온 원근법, 명암법 등의 전통적인 제작방식과 사물의 상징체계에서 벗어나 대상의 본질을 연구하고 존재성을 부여함으로써 현대미술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가 60대에 그린 ‘사과와 오렌지’를 포함한 몇몇 작품은 19세기 미술과 20세기 미술을 가르는 새로운 방향이었다. 실제 그가 사용한 실험적인 색채는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미술인 야수파에 영향을 끼쳤다. 다시점의 구도는 입체파의 탄생을 촉발했다. 그의 말년 작업에는 ‘질서를 지닌 색채로 덮은 평면’으로 정의되는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의 추상미술까지 녹아 있다.

이에 프랑스 작가 모리스 드니는 선악과로 추정되는 에덴동산의 사과, 뉴턴의 사과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과로 세잔의 사과를 꼽았다.

세월이 흘러도 사과는 예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속했다. 예술가들은 여전히 사과에 깊은 애정을 드러냈고 신화, 종교, 문학, 철학, 시각조형을 넘나들며 시대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투사했다. 고대 신화에서 사과는 불멸과 아름다움, 사랑 등 인간의 근원적인 것을 상징했으며 종교에선 삶과 죽음을, 문학과 시각에선 자연과 생명을 표현하는 장치로 활용됐다.

사과는 표상을 넘어 숨겨진 진실과 인간의 본성 등의 다양한 얼굴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얼굴 중에는 정치적인 것도 있다. ‘(헤스페리데스의 황금사과를 들고 있는)헤라클레스 모습의 콤모두스 흉상’과 같은 과거 작품에서부터 브렉시트를 썩은 사과에 빗댄 영국의 현대 풍자화에 이르기까지, 이들 작품에서는 권력의 신격화와 정치권력에 대한 조롱 및 비판적인 표정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예술에서 사과를 다루는 빈도는 낮아지는 추세다. 반면 정치판은 동음이의어와 도상을 차용한 졸렬한 수사로 곧잘 활용한다. 2021년 발생한 ‘개 사과’ 사건이 대표적이다. ‘개 사과’ 사건은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내란수괴범인 전두환에 대해 ‘정치는 잘했다’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은 뒤, SNS에 자신의 반려견과 사과를 합친 사진을 올렸다가 벌어진 파문을 말한다. 당시 손바닥 왕(王)자 못지않은 논란을 낳았다.

정치인들 탓에 한국에서 사과의 이미지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뇌물 하면 사과(상자)가 떠오르고, 부정청탁이나 책임회피가 연상된다. 선거 전 지역 주민 등에게 사과 200여상자를 보냈다는 의혹에 휩싸였던 김미경 은평구청장의 경우가 한 예이다. 구청장은 무혐의로 종결됐지만 그의 수행비서는 법적 처벌을 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문화적 혁명을 이끈 사과가 한국정치판에선 유독 유혹, 욕망, 타락, 방종의 기호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과의 수난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홍경한 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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