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껴지지 않는 정치

박상훈 |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뉴스마다 정치 이야기들은 엄청 하는 데, 우리 같은 사람은 도통 느껴지지가 않아요.” 며칠 전 택시를 타고 가다 라디오에서 대선 관련 보도가 계속되자 운전사 아저씨가 무심히 던진 말이다. “유세장 가본 지가 언젠지 모르겠네. 요즘은 여론조사로 선거 다 하는 거 같아요. 선거도 없어지지 않을까요? 여론조사로 할 날이 오겠죠?”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매일 매일의 주가 변동에 울고 웃는 주식투자처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쏟아내는 여론조사 결과에 정치가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려도 정말 괜찮은 걸까. 여론조사가 정치를 지배하는 지금과 같은 일이 계속돼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만 맴돌았다.

[정동칼럼]느껴지지 않는 정치

여론조사는 참고할 만한 ‘소극적 지식’으로 이용될 때 긍정적 기능을 할 수 있다. 여론조사는 여론조사일 뿐 그것이 시민 주권의 기능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방법론적 한계 때문에 해석에 있어서도 신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여론조사가 공직 후보 결정 과정을 지배하고 마치 시민의 의견을 집약한 것처럼 해석되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게 되면 민주적 정치과정과 자유로운 공론장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럴 바에야 중앙선관위를 공신력 있는 여론조사 기관으로 바꾸고 선거를 없애거나, 아니면 차라리 ‘정치 주식시장’을 개설하고 정당과 후보들을 상장시켜 매일 매일의 ‘시민 주가’를 확인하게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비자의 선호를 주어져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시장 원리와는 달리,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선호는 공적 논의를 거치면서 집합적으로 형성되는 것을 본질로 한다. 시민적 선호 형성을 이끄는 정치 과정과 언론의 공론장이 좋아야 민주주의도 좋아진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언론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여론조사를 즐겨 의뢰하고 경쟁적으로 동원하는 일을 자제하면 좋겠다. 그 비용으로 취재 기자들이 좀 더 양질의 기사를 쓸 수 있도록 정치과정과 시민주권의 현장 곳곳을 누비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그게 언론답기도 하다.

정당들도 생각할 것이 많아 보인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유권자 ‘속’에서 시민의 선호를 형성하고 결집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정당은 대상화된 유권자 ‘앞’에 있다. 그것도 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가상적’ 존재로 저 멀리 있다. 보고 들을 수는 있으나 느껴지지 않는 정치는 그 때문인지 모른다.

정당이 유권자 속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정당이 ‘시민생활의 조직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노동문제가 심각하고 비정규직이 큰 문제라면 그 속에서 그들과 함께 대안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정책은 정치인이 만들어 홍보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의 수요자와 함께 만들고 책임 있게 실천하는 것이다. 그랬다면 정당 대신 캠프가 선거를 주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역이나 직능 집단의 대표들 대신 교수나 변호사와 같이 전문가 타이틀을 앞세운 사람들만 우대받는 선거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후보들이 경제민주화를 말하는 데, 아무리 둘러봐도 ‘경제 시민’은 찾아볼 수 없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인 노동자의 시민권은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진보 보수 가릴 것 없이 모든 후보가 자유롭게 경제민주화를 내걸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말하는 건 일종의 온정주의적 권위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나를 뽑아 주면 재벌 혼내주고 일자리 주겠다는 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시민은 그야말로 누가 자신들에게 선한 군주가 되어 줄지나 판단해야 하는 수동적 존재 이상이 아니게 된다.

미디어가 선호하는 인물들만 부각되는 선거, 일반 시민의 열정은 표현되지 않는 선거, 시민주권의 구체성은 사라지고 여론조사만 있는 선거, 공약은 많은데 누가 누구를 위해 왜 만들었는지는 모호한 선거, 불평등 심화로 사회 중하층의 절망감은 커졌는데 그들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는 선거, 그런데도 진심과 진정성 같은 공허한 도덕 담론만 인플레이션된 선거를 지켜보면서, 시민으로서 나는 모멸감을 느낀다.


Today`s HOT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아르메니아 국경 획정 반대 시위 불타는 해리포터 성
틸라피아로 육수 만드는 브라질 주민들 페루 버스 계곡 아래로 추락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이·팔 맞불 시위 인도 스리 파르타샤 전차 축제 시위대 향해 페퍼 스프레이 뿌리는 경관들 토네이도로 쑥대밭된 오클라호마 마을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