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보다 더한 역병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아픈 어머니가 집에 계신다. 얼마 전 산소공급기에 문제가 생겼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출장 수리가 안된다고 한다. 또 큰 병원 가야 할 일이 생겼는데 하필이면 추천받은 병원에서 확진자가 대거 발생했다. 전국 요양병원이 전수조사 중인 가운데 집에 모셔 다행이다 싶었지만 우리집도 이 역병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멀리 있던 공포가 점차 내 집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다. 역병의 위험을 비켜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정동칼럼]코로나19보다 더한 역병

질병도 위험하지만 더 큰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다. 실내체육시설과 유흥업소 등에 운영 중단 권고가 내려졌고 장사가 안돼 자진 휴업하거나 폐업하는 곳도 속출하고 있다. 10만명의 학교 비정규직은 개학 연기로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됐고, 여행이나 관광운수업 등에서는 무급휴직에 이어 정리해고가 이어지고 있다. 대기업 해외 공장이 멈추기 시작했고 세계 경제도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병에 걸리지 않고 버티는 것도 문제겠지만 생계를 해결하는 게 더 큰 어려움이 됐다.

하지만 전대미문의 위험과 공포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상대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다. 도시 봉쇄나 이동 금지, 생필품 사재기와 총기 구입 쇄도도 멀리 있는 다른 나라의 일이다. 정부에 대한 비난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질병관리본부의 신속한 대처와 투명한 정보 공개에 많은 사람들이 신뢰를 보내고 있다. 또 강력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예배와 영업을 강행하는 곳이 있고 질병 예방보다 봄철 꽃구경에 취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국민은 차분하게 정부의 방역지침을 따르고 있다.

참 훌륭한 국민들이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권리의식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과도한 자유의 제한이나 인권 침해 없이도 전파 속도가 제한될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우한 교민은 결국 따뜻한 환대 속에 입국했고 어느 정치인은 대구·경북 지역 봉쇄 발언으로 당직에서 사퇴해야 했다. 중국인이나 신천지 교인을 향한 혐오 발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 국민적 분위기는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질병관리본부가 제 역할을 하는 것도 국민들 덕분이다. 세월호 사건을 눈감지 않고 안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대대적으로 촉구한 결과다.

그런데 예외도 있다. 바로 정치인들이다. 지금 같은 비상상황에도 아랑곳 않고, 아니 오히려 국민들의 관심이 다른 데 가있는 틈을 타서 자기들끼리의 권력 다툼에만 혈안이다. 정치권이 비례정당을 둘러싼 이전투구로 난장판이 됐다. 국민은 안중에 없고 팬덤 정치만 남았다. 명분은 사라지고 이기는 것만이 지상과제가 됐다. 국민이 존중받지 못하고 상식과 대의가 실종되고 내일을 위한 비전에는 무심한 선거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는 명약관화하다.

루소가 틀렸다.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국민들은 투표할 때만 자유롭고 투표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고 했지만 2020년 한국에서는 선거 때조차 국민이 주인이 될 수 없다. 정당과 정치인은 선거로써 심판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심판도 무의미해졌다. 누가 차선이고 차악인지도 구분이 어렵게 됐다. 4·15 총선에서 주인은 정치인이고 국민들은 노예에 불과할 위기에 처했다. 노예가 어찌 주인을 심판할 수 있겠는가. 어느 주인을 고를까 고민하거나 고민도 없이 주인을 맞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이 훌륭한 국민들은 어떤 잘못된 정권도 심판하지 않고 넘어갔던 적이 없다. 멀리 4월 혁명과 6월 항쟁을 들지 않더라도 불과 몇 년 전의 촛불집회가 증명한다. 달라진 것은 대상뿐이다. 과거에는 집권세력에 한정됐다면 지금은 여야를 망라해 기득권 정당 전체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지난가을 ‘조국 사태’를 겪으면서 국정을 농단하고 국민을 농락하는 정치집단이 과거 독재정권에 기반을 둔 정당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지금, 자유한국당에 이어 민주화운동을 뿌리로 해 탄생한 민주당까지 반민주적 권모술수로 헌정질서를 교란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누군가는 위성정당에 투표하지 말자고 한다. 또 누군가는 혐오를 양산하는 거대 양당에 표를 주지 말자고 한다. 시민사회단체들은 비례 ‘위장정당’ 해산을 위해 온라인 저항행동을 전개하자고 하고 선거 연기나 보이콧 주장도 나오고 있다. 어느 게 좀 더 나은 방법인지는 몰라도 국민들의 체념과 분노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누가 승리하더라도 암수에 의한 것이지 국민과 함께 얻은 정당한 승리는 아니다. 현 정부도 앞으로 국민으로부터 정치적 동력을 얻기는 어렵게 됐다. 코로나19보다 더한 역병이 지금의 한국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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