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지난주 초 강남역사거리 25m 철탑에서 고공농성 중인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를 구하기 위해 외신기자회견이 열렸다. 거기서 어느 외신기자가 물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왜 고공농성 같은 ‘기이한’ 투쟁을 하느냐고. 왜일까? 노동 3권이 법대로 보장된다면 사측과 교섭해 문제를 해결하겠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시로 노조와해공작이 들어오고 파업하면 업무방해죄로 구속되기 일쑤다. 심지어 파업으로 회사에 손해를 입혔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노조 재산은 물론 노조원의 급여까지 압류한다.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때는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다며 경찰과 국가가 노조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했다.

[정동칼럼]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

단체교섭이 법대로 안되니까 결국 회사가 아니라 국민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땅에선 아무리 소리쳐도 귀 기울여주지 않으니 자꾸만 위험하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2014년 5월 스타케미칼 노동자 차광호가 45m 굴뚝에 올라 408일 동안 있었다. 세계 최고 기록이었다. 2017년 11월엔 파인텍 노동자 홍기탁과 박준호가 75m 굴뚝에 올라 421일을 지샜다. 그들은 차광호의 기록을 깨며 연이어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또 지난해엔 영남대의료원의 박문진과 송영숙이 74m 병원 옥상에 올라 227일을 버텼다.

김용희도 마찬가지다. 1995년 마지막으로 부당해고되고 바로 출근투쟁을 시작했으며 단식만도 1998년 7월부터 올 4월까지 여섯 번을 했다. 그사이 연행되거나 구속된 일은 부지기수다. 1999년에는 48일차의 단식농성을 민주노총 전 위원장들의 설득으로 중단하자마자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단식을 해도 위험한 곳에서 해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이 위험해하는 곳, 손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어야 세상에서 돌아봐주고 경찰들이 잡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단식 8일째 되는 날 그는 철탑으로 올라갔다. 그의 판단이 옳았다. 땅에서는 그를 외면하고 지나쳤던 사람들이 하늘 위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경찰은 그를 끌어내려 구속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김용희는 지금도 그곳에 있다. 하루 종일 매연과 소음이 가득한 데다 지름 1m의 쇠바구니는 앉아서도 다리를 펼 수 없는 곳으로 역대 어떤 고공농성 장소보다 열악하다. 가축우리만도 못한 그곳에서 고공농성 300일을 넘겼고 단식도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아직까지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하루빨리 내려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왜 21세기에 쌍팔년도식 투쟁을 하느냐고 힐난하며 외면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2020년에도 쌍팔년도처럼 노조탄압과 부당해고가 판치는 현실은 무시하고 있다. 누군가는 오래전의 일을 왜 지금에 와서 문제 삼느냐고도 한다. 하지만 잘못된 얘기다. 지금에 와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이다. 비난받을 것은 25년이라는 세월을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싸워온 김용희가 아니라 25년간 응답하지 않는 삼성, 그리고 연행과 구속을 일삼은 정부다.

외신기자는 또 이렇게 물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 번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냐고. 다른 일반 민원도 정부가 기한 내에 답변을 하게 되어 있을 텐데 이렇듯 생사를 건 공개적인 민원에 어떻게 단 한 번도 반응이 없을 수 있냐고. 왜 그랬을까? 대통령 취임 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열세 번이나 만났으면서 왜 삼성본관 바로 옆에 있는 김용희는 외면한 것일까? 더욱이 문 대통령은 1990년대 초 김용희가 삼성에서 1차로 부당해고됐을 때 담당변호사였는데 말이다.

답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틀 전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김용희의 고공농성 소식을 보도했다. 신문은 그가 사반세기 동안 보상과 사과, 복직을 요구해왔다는 사실과 함께 삼성의 영향력이 곳곳에 스며 있어(so pervasive) 많은 사람들이 삼성은 건드릴 수 없는(untouchable) 곳이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기사에서 추론하자면 삼성의 영향력은 청와대에도 미치고 있고 김용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 된다.

문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때 30여일째 단식 중이던 ‘유민 아빠’ 김영오 옆에서 국회의원 신분으로 동조 단식을 열흘간 벌였다. 당시 한 신문은 이를 ‘도덕형 단식’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 후 청와대에서는 삼성에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나온 일도 없다. 문 대통령의 ‘도덕’이 왜 김용희의 처절한 외침에는 미치지 않는지 청와대는 합리적인 답을 내놓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삼성공화국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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