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업 정서는 없다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 미국 현지공장 등을 둘러볼 일이 있다며 전격 출국했던 그가 지난 주말 황망히 귀국했다. 도피성 외유의 냄새가 짙었지만 검찰 압박에 못이겨 결국 6일 만에 되돌아오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했다. 정회장은 잠시 미국에 나가 있는 사이 혐의 내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비자금 문제를 넘어 편법 후계 상속이라는 훨씬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는 곧 검찰에 불려나갈 테이고, 사법처리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다.

글로비스. 이미 밝혀져 있듯이 정회장이 아들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에게 현대·기아차를 넘겨주기 위한 방편으로 설립한 회사이다. 2001년 정회장 부자(父子)는 50억원을 들여 이 회사를 세웠다. 글로비스는 다른 계열사들의 사업 몰아주기 덕에 불과 5년 만에 연매출 1조5천억원의 회사로 급성장했다. 정회장 부자의 지분 값어치만 1조원가량. 배당금과 일부 지분 매각분을 제외하고도 20배의 평가익을 올린 셈이다. 계열사에 돌아가야 할 이익이 정회장 부자에게 귀속된 것으로, 보다 정확하게는 이들 부자가 회사 재산을 탈취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현대·기아차 노골적 편법상속-

정의선 사장. 글로비스와 기타 새로 설립한 비상장 계열사들을 통해 후계 상속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려 했고, 실제 일부는 실행에 옮겼다. 검찰 수사로 정사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은 일단 제동이 걸린 형국이지만, 이 위기만 넘긴다면 예전 여느 재벌 총수들이 그랬듯이 그는 세금 몇 푼 내지 않고도 현대·기아차 총수에 등극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기아차 경영권 승계 과정의 묘미는 삼성그룹과 대비할 때 더더욱 두드러진다. 삼성은 거의 10년 전 이건희 회장의 아들 재용씨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재용씨는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을 이루는 에버랜드의 전환사채(CB)를 헐값에 넘겨받은 것이 문제가 돼 지금도 단단히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태. 끝내 삼성은 8천억원어치의 재산을 사회 헌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여론이 이런 삼성을 주목하고 있는 사이 현대·기아차는 그 뒤에 숨어 천연덕스럽게 편법 상속을 강행했다. 사실 수법은 더 노골적이다. 그것도 초스피드로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그 결과 삼성 이재용씨가 아직 상무 자리에서 멈칫해 있는 것과 달리 30대 중반의 정의선씨는 이미 기아차 사장 자리를 꿰찼다.

우리나라 재벌 또는 그 주변을 맴도는 이들이 아(我)와 적(敵)을 가를 때의 단골 무기 중 하나는 이른바 시장경제론이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시장경제를 해치는 존재, 시장경제의 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젠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재벌 기업 4곳 가운데 1곳꼴로 ‘문제성 거래’를 하고 있다는 엊그제 참여연대의 자료에서도 밝혀졌듯이, 상당수 재벌들이 악의적인 내부거래를 통해 부당 이익을 챙기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 나라 재벌, 적어도 몇몇 재벌 오너들은 시장경제의 수호자이기는커녕 그 반대자임이 확연해진 것이다.

-일부기업의 反시장경제 행태-

재벌과 그 지지자들은 예의 시장경제론을 넘어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가 문제라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반기업 정서라는 것이 그들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존재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반기업 정서의 뿌리는 일부 대기업의 반기업적 행태에서 찾는 것이 훨씬 온당하다. 맹목적 극단주의자가 아닌 한,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건전한 기업들에 거부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반기업 정서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현대·기아차가 사재 출연 등을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벌써부터 흘러나온다. 삼성 따라하기다. 그걸로 위기를 넘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위기에 몰린 재벌들의 이전 사례를 보면 그럴 것도 같다. 재벌들이 진정으로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애초 갖고 있지 않다면, 그만이라도 감지덕지 받아들여야 하나.

〈박승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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