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권화시대의 소용돌이

1960년 전후 정치적 격동기에 주한 미대사관 문정관을 지낸 그레고리 헨더슨(한국명 한대선)이 38년전 저술한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는 지금도 학계에서 회자되는 노작이다. 조선시대부터 이승만, 장면, 박정희 정권에 이르는 한국정치를 분석한 헨더슨은 한국정치의 본질을 정치권력을 향해 상승기류를 타고 몰려드는 소용돌이(vortex) 현상으로 파악했다.

그는 한국민이 단일민족이라는 동질성 때문에 오히려 원자처럼 분열돼 있으며 원자화된 한국인이 모두 정치권력을 향해 소용돌이처럼 몰려들기 때문에 중앙집중화가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이런 환경속에서 한국정치는 당파성과 개인중심의 기회주의를 보이면서 합리적 타협의 기초를 결여하게 되었으며, 이런 소용돌이 정치패턴에 대한 처방은 다원주의와 분권화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정치판 反다원주의 문화 만연 -

물론 헨더슨이 경험한 시대와 오늘날의 한국정치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제도적 민주화는 물론이고 지방자치제 실시로 외형상의 분권화도 이루어졌다. 언론자유와 인권이 신장되고 이익단체 시민단체도 괄목할 만큼 성장했다.

그럼에도 ‘문제’는 그의 이론이 아직도 퇴색되기는커녕 한국사회의 이해에 적잖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정치행태나 의식세계, 행동양식의 내면에서 여러 갈래의 ‘변형·복제된 소용돌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정치사회에 만연한 집단주의와 패거리문화, 연고주의, 승자독식 문화 등이 그 예다.

헨더슨은 대기업의 발전이 다원주의를 제도화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재벌은 정경유착, 총수중심의 권력집중이라는 또다른 소용돌이 문화속에서 성장·발전했다. 헨더슨은 또 ‘서울이 곧 한국’이라고 했지만, 초(超)집중화한 지금의 서울은 그때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새로운 소용돌이 이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지난 10여년간 민주화와 지방자치의 진전으로 분권과 자율, 다원화가 국정의 핵심과제로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중앙이건 지방이건 분권화의 가치가 제대로 전파됐다고는 보기 어렵다. 특히 분권화의 미명 하에 권력의 소용돌이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정치현실이다.

한 예가 이해찬 전 총리의 골프파문으로 좌절된 분권형 대통령제 실험이다. 권한과 책임, 역할을 분담하면서 국정의 효율성과 민주성을 강화하는 취지에서 ‘총리의 실세화’가 도입됐으나 총리가 ‘권력의 분신’으로 인식되면서 소용돌이 현상을 자초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초부터 시스템에 의한 국정운영, 분권화된 리더십을 강조해왔지만 현실정치에서는 대통령 개인을 둘러싼 집권세력과 지지자들의 소용돌이 현상이 맞물리면서 정치사회적 갈등을 초래했다.

분권화의 가장 중요한 시험대인 지방자치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지방자치는 오랜 경험과 역사를 가진 선진국과 달리 어떻게 하면 지방의 득표기반을 장악하느냐가 정치권의 1차적 관심사였다. 주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민주적 터전을 가꿔가는 지역정치의 현실은 척박했다. 그 결과 지역유지 등 기득권세력이 주민 대표가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포기할수없는 ‘공천의 지방화’-

최근 한나라당에서 확산되고 있는 공천비리는 ‘분권화의 이상’이 어떻게 ‘소용돌이의 현실’에서 왜곡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중앙당과 보스에게 집중됐던 공천권한을 사실상 지방으로 떼어주는 공천혁명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 돼버렸다.

하지만 이 때문에 ‘공천의 지방화’라는 정당사상 획기적인 개혁이 퇴색돼선 안될 일이다. 어떤 희생과 파열음이 나더라도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다양한 갈등을 흡수·통합하는 분권적 국정운영의 성과는 선진국의 역사적 경험으로 입증된 바다. ‘소용돌이 정치문화’에 대한 헨더슨의 주장이 더이상 이론적 가치를 잃어버릴 때, 한국사회는 비로소 진정한 변화와 개혁이 일어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송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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