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아카데미 물들인 ‘빨간 배지’

정유진 논설위원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단순히 영화만을 위한 무대가 아니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착용한 모든 것이 전 세계의 이목을 끄는, 레드카펫 위의 패션쇼장이기도 하다.

10일(현지시간) 열린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다름 아닌 빨간 배지였다. <가여운 것들>에 출연한 배우 라미 유세프, <바비> 주제곡을 부른 가수 빌리 아일리시, <헐크>로 유명한 마크 러팔로의 가슴팍에 하나같이 동전만 한 크기의 그 배지가 달렸다. 빨간 배지엔 검은 하트를 품고 있는 손바닥이 그려져 있다.

“친애하는 바이든 대통령님, 우리는 예술가이기 앞서 한 인간으로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펼쳐지고 있는 엄청난 죽음과 공포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시작은 이 한 장의 공개 편지였다. 가자지구 참상을 막기 위해 ‘휴전을 촉구하는 예술가들’에 연대 서명한 이들은 제니퍼 로페즈, 벤 애플렉 등 400명에 달한다. 이 모임의 상징인 빨간 배지를 단 영화인들이 이날 저마다 팔레스타인인과 똑같은 한 명의 인간임을 선언하기 위해 레드카펫 위에 선 것이다. ‘휴전을 촉구하는 예술가들’이 시작한 이 움직임은 ‘휴전을 촉구하는 운동선수들’ ‘휴전을 촉구하는 뮤지션들’로 확대돼 나갔다.

지난해 10월7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후 가자지구 내 사망자는 3만명을 넘어섰다. 계속된 교전으로 구호식량이 반입되지 못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 4일엔 미라처럼 바싹 말라 가죽만 남은 10세 소년 야잔 카파르네가 결국 눈을 감았다. 지난달 23일엔 마후무드 파투라는 생후 2개월 영아도 분유를 먹지 못해 사망했다. 올해도 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인 라마단이 돌아왔지만, 가자지구 주민들은 축복과 감사 대신 전쟁의 공포와 기아 속에서 라마단을 보내야 할 처지다.

‘휴전을 촉구하는 예술가들’의 공개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우리는 후손들에게 그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고 말하기를 거부합니다. 유엔 긴급구호 책임자인 마틴 그리피스가 말한 것처럼, 역사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가수 빌리 아이리시가 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 서있다. 그의 가슴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휴전을 지지하는 빨간 단추가 달려 있다.  AP연합뉴스

가수 빌리 아이리시가 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 서있다. 그의 가슴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휴전을 지지하는 빨간 단추가 달려 있다. AP연합뉴스

영양실조로 사망한 가자지구 10살 소년 야잔 카파르네. | AP연합뉴스

영양실조로 사망한 가자지구 10살 소년 야잔 카파르네.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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