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위 앞둔 이준석이 '스키피오'를 말한 까닭은?

조문희 기자

[여의도 앨리스] “정치부 기자들이 전하는 당최 모를 이상한 국회와 정치권 이야기입니다.”

“결국 그에게도 포에니 전쟁보다 어려운 게 원로원 내의 정치싸움이었던 것 아니었나. 망치와 모루도 전장에서나 쓰이는 것이지 안에 들어오면 뒤에서 찌르고 머리채 잡는 거 아니겠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21일 밤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이다. 당 윤리위원회는 22일 이 대표의 성비위 증거인멸교사 의혹을 두고 징계 심의를 한다. 이 대표는 작게는 경고, 크게는 제명까지 징계를 받을 수 있다. 더 이상 대표직을 수행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 대표는 늦은밤 왜 포에니 전쟁을 언급한 것일까.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에서 검투사 막시무스는 스키피오의 카르타고 정벌을 재현한 대전차 전투에 나선다.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에서 검투사 막시무스는 스키피오의 카르타고 정벌을 재현한 대전차 전투에 나선다.

■로마 명장 스키피오…정치적 공격에 오명

이 대표가 언급한 ‘그’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명장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이다. 당시 로마의 라이벌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로마를 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카르타고가 지금의 아프리카 북단(현 튀니지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Africanus·아프리카의 정복자)’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대(大) 스키피오’라고도 불린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을 격파한 전쟁이 제2차 포에니 전쟁이다. 이때의 승리는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스키피오는 생전 영광과 괴로움을 함께 겪었다. 명장 한니발을 꺾어 영웅이 됐으나, 민중의 인기를 얻은 스키피오가 독재적 권력을 확보할까 두려워한 정적들에게 견제받았다. 로마의 호민관은 스키피오가 적장에게 받은 돈을 국고에 넣지 않고 부적절하게 사용했다고 공격했다. 원로원에서 스키피오를 지지하는 이들은 침묵했고 정적들만 목소리를 키웠다.

정치적 공격에 시달린 스키피오는 정치 중심지 로마를 떠나 시골로 내려간다. 원로원의 1인자 ‘프린켑스’로 불리고 감찰관, 집정관 등 권좌에 앉았던 시절을 뒤로한 채 평생을 외로이 살다 눈을 감는다. 스키피오의 공금횡령 혐의가 벗겨진 것은 그의 사후의 일이었다.

이 대표는 스키피오와 자신을 동일시한 것 같다. 지난해 대표 임기를 시작한 뒤 대선·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상대를 내리 이긴 자신과 카르타고라는 호적수를 격파한 스키피오의 유사성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스키피오가 끝내 무혐의로 밝혀진 것도 살펴볼 대목이다. 이 대표는 징계 심의 혐의인 ‘증거인멸교사에 따른 품위유지의무 위반’에 대해 경찰의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항변 중이다. 이 대표는 “윤리위가 이례적으로 익명으로 많은 말을 하고 있는데 무슨 의도인지 궁금하다”며 정치적 공격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22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페이스북 갈무리

22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페이스북 갈무리

■스키피오, 망치와 모루…이준석이 즐긴 역사 비유

이 대표가 스키피오를 호명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는 제20대 대선을 6개월 앞둔 지난해 9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토론회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고민이 많다 보니 침대에 누우면 큰 전투를 앞둔 고대의 장수들에 빙의해서 망상하곤 합니다. 가우가멜라 전투를 앞둔 알렉산더, 자마 전투를 앞둔 스키피오 등 두루 거쳐 망상한 뒤 해하 전투를 앞둔 항우에까지 생각이 닿습니다.”

하나같이 명장으로 꼽히는 이들은 젊은 나이에 큰 성과를 이뤘다는 점에서도 공통되다. 한니발에 맞설 때 스키피오는 20대 청년이었고, 이후 30세에 집정관에 오른다.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우스 3세에게 승리를 거둔 건 25세 때였고, 항우는 해하 전투에서 30살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망치와 모루’ 이야기도 이전에 한 적이 있다. 대선을 2주 가량 앞둔 2월20일 SNS에 ‘망치와 모루’라는 한 줄 글을 남긴 것이다. ‘망치와 모루’는 병력을 둘로 나눠 운용하는 군사 전술을 비유하는 말이다. 보병(모루)이 적을 대치하며 묶어두는 사이 기병(망치)이 배후에서 기동전을 펼쳐 적을 섬멸하는 전술이다.

이 대표는 자신이 내세운 ‘세대포위론’을 ‘망치와 모루’에 빗대기도 했다. 그는 지난 1월17일 YTN라디오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이라는 게 있는데, 기병이 헬리콥터로 바뀌기도 하고 전철로 바뀌기도 하면서 계속 계승·발전돼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세대포위론이라는 것도 결국 세대결합론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한동안 우리 당의 주요 전술로 자리잡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이준석 글 해석 다툼…한니발? 스키피오?

이 대표의 글을 두고 촌극도 벌어졌다. 이 대표가 자신을 한니발에 비유했다는 기사가 여럿 나온 것이다. 윤리위를 하루 앞두고 게시된 글이다 보니 관심을 많이 받았지만, 이 대표가 글에 비유 대상을 명확히 적시하지 않아 오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전후 카르타고의 실질적 통치자가 됐으나, 정적에게 밀고당해 로마에 쫓긴 한니발의 삶이 이 대표의 상황과 유사한 것으로도 해석됐다. 한니발이 코끼리 부대를 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한 창의적 전술가였다는 점도 이 대표와의 유사성으로 꼽혔다.

이 대표가 한니발을 거론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 대표를 비꼬는 이도 있었다.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는 SNS에 “이준석이 자신의 처지를 역사적 인물과 비교하고 싶다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자마자 경제파탄 책임지라며 국민들에 의해 쫓겨난 처칠의 상황과 비슷하다”며 “한니발은 로마에게 전쟁에서 패하면서 쫓겨난 거니 전혀 다른 사례”라고 적었다.

이 대표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자신의 SNS 글에 대해 “스키피오에 대한 얘기”라며 “그거 자꾸 한니발이라고 하시는데, 너무 자명한데 자꾸 물어보신다”고 했다. 이 대표는 기자들이 추가 설명을 요구하자 “스키피오의 삶을 쭉 보시면 된다”고 했다. 변 대표는 이 대표의 해명에 대해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했다. 그는 “망치와 모루는 보병으로 막고 기병으로 때려부수는 한니발 특유의 전술인데, 이제 와서 앞뒤가 안맞으니 스키피오”라고 했다.

이 대표는 이후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해 “나중에 스키피오의 후손인 소(小) 스키피오가 3차 (포에니) 전쟁을 이끌게 되는데, (이렇게) 다시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전쟁에 싸웠던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라며 “정치판에는 2년마다 보통 선거가 있다”고 했다. 2년 후 총선 등 앞으로의 선거를 새로운 전쟁에, 자신을 향한 의혹 제기 등을 뒤통수에 비유한 것이다.

국민의힘 중앙윤리위원회는 이날 오후 7시 국회 본관에서 회의를 열어 이 대표 징계를 심의한다. 윤리위는 김철근 당대표 정무실장을 출석시켜 이 대표의 의혹과 관련한 사실관계 확인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앞서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는 이 대표에 대해 성 상납 의혹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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