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경영자·멘토로 이미 인기
문재인 9권·박근혜 7권 뒤이어
대통령은 책과 함께 나왔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대통령과 책의 관계를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김대중 후보는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영국에 체류하다가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를 내면서 정계복귀의 의지를 다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적인 이야기까지 진솔하게 털어놓은 <여보 나 좀 도와줘>를 내면서 서민적이고 감성적인 이미지를 만들었고, 이러한 흐름은 기타를 치거나 눈물을 흘리는 대선 광고 전략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의 이미지는 1995년 <신화는 없다>와 함께 연출되기 시작했다.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이라는 입지전적인 이야기는 사회적 성공에 대한 독자의 열망을 자극했고, 이 열망은 지난 대선을 지배했다.
반면 이들과 대결해 낙선한 이회창, 정동영 후보는 독자의 사랑을 받은 이렇다 할 책을 내지 못했다.
책의 판매량만으로 본다면 올해 대선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이는 안철수 무소속 후보다. 교보문고에서 올해 1~10월 유력 대선 후보 3인에 관련된 책의 판매량을 조사한 결과, 안철수 후보는 50위권 내에 35권의 책을 올렸다. 문재인 민주당 후보는 9권,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7권이었다(<안철수냐 문재인이냐>는 양쪽에 포함).
1위에 오른 <안철수의 생각>은 7월 출간돼 3개월 만에 70만부가 팔렸다. 극비리에 만들어져 배포되는 등 출판가에 많은 화제를 만든 이 책에서 안 후보는 청년실업, 비정규직, 공교육 붕괴, 언론사 파업 등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의견과 해법을 밝힌다. 당시까지 대선 출마 여부를 확실하게 밝히지 않았던 안 후보는 선거공약집 성격을 띤 이 책으로 사실상의 출사표를 던졌다.
지난해 2월 출간돼 지금까지 10만부가량 판매된 <안철수의 서재>는 2위를 차지했다.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형식으로 낸 <문재인의 서재> <박근혜의 서재>는 의미 있는 판매량을 기록하지 못했다.
문재인 후보의 <운명>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2주기를 맞은 지난해 발간됐다.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 참여정부의 비사를 기록했다. 문 후보는 책에 “참여정부를 넘어서야 한다”며 “성공은 성공대로, 좌절은 좌절대로 뛰어넘어야 한다”고 적었다. <운명>은 출간 석 달이 안돼 20만부를 돌파했고, 문 후보는 책 출간 1년 후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문 후보는 출마 이후 정치인으로서의 좀 더 구체적인 구상을 담은 <사람이 먼저다>를 내놨다.
박근혜 후보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는 17대 대선을 앞둔 2007년 7월 출간됐다. 박 후보는 이 책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 부모에 대한 기억, 청와대를 떠난 이후 정계로 돌아오기까지의 세월, 정치인으로서의 포부 등을 밝혔다.
서점가에서 ‘안철수’ 관련 서적이 인기를 끈 이유는 몇 가지로 짐작할 수 있다. 우선 박근혜, 문재인 후보에 비해 정치 신인이라 할 수 있는 안 후보의 정치 구상에 대한 검증, 정보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안철수의 서재>를 낸 출판사 푸른영토의 이세경 편집장은 “안철수씨가 서울 시장 보궐 선거에서 박원순 후보에게 양보를 한 후 정치적 입지가 대두되던 시점에 책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전에도 안철수 후보에 관련된 책은 많았지만 출간된 지 오래됐거나, 공부 방법·경영법 등 실용적인 내용의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안 후보가 성공한 경영자이자 청년들의 ‘멘토’로 떠오르면서 서점가에서 일찌감치 인기를 끌고 있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실제 베스트셀러 50위권 내의 안 후보 관련 책들 중 상당수가 경영자 혹은 멘토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CEO 안철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과 <CEO 안철수 영혼이 있는 승부>는 각각 2004년, 2001년에 나왔음에도 지금까지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대선 후보를 직접 다룬 책의 판매량이 쏠쏠한 것과 달리, 정치평론가, 지식인들의 정치서적은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다. 대선을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지난해의 <닥치고 정치> 같은 정치서적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의 <이분법 사회를 넘어서> 정도만이 출간 1개월 만에 1만4000부가 팔리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책을 낸 다산북스의 서선행 팀장은 “제목부터 양극단에 속하지 않은 독자층에 맞춰 지어졌다”며 “우리 사회의 중도층 독자들이 예상보다 많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기호 소장은 “책을 통한 합리적인 정책 제안이 부족한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