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표로도 안 보이나요? 다문화 정치는 지금

김서영 기자
‘이주배경인구’의 빠른 증가로  한국사회는 다문화 사회로의 문턱을 밟은 상황이다. /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이주배경인구’의 빠른 증가로 한국사회는 다문화 사회로의 문턱을 밟은 상황이다. /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그는 파키스탄 이민자 부부가 낳은 8남매 중 다섯째 아들이다. 방 3개의 공공주택에서 10명의 가족이 부대끼며 살았다. 신문 배달과 일용직 노동을 하며 학교에 다녀야 했을 정도로 곤궁했다. 런던 다민족 주거지 ‘투팅’에서 태어나 자란, 현 런던시장 사디크 칸의 이야기다.

한국사회와 동떨어진 이야기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의 ‘이주배경인구’ 증가 속도를 보면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니다. 사디크 칸이 청소년기를 보내던 1980~1990년대 영국의 이주민 비중은 6~7%. 2040년 한국이 유사한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외국인과 이민 2세, 귀화자 등 이주배경인구가 총 인구의 5%를 넘으면 다문화·다인종 국가로 분류한다. 현재 한국의 이주배경인구 비중은 4.3%다. 즉 한국사회는 다문화 사회로의 문턱을 밟은 상황이다. ‘다문화·다민족·다인종’ 사회를 앞둔 우리에겐 두갈래의 길이 있다. 차별·혐오를 방치하면 사회갈등이 만연하겠지만, 노력을 기울인다면 공존과 통합을 이룰 수 있다.

정치는 ‘다양성의 세계’를 여는 마지막 열쇠다. 이주민 혹은 이주배경인구를 동등한 정치 주체로 인정하고, 나아가 그들을 대표자로 선출할 때 사회는 질적으로 성장한다. 한국의 사디크 칸 시장은 언제 나올 수 있을까. ‘성숙한 다문화 사회’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한국의 이주민들과 연구자들에게 물었다. 마지막 허들, 정치에 대해.

태국인 어머니를 둔 김민지씨(가명·22)는 생후 3개월에 한국으로 건너와 주로 한국에서 자랐다. 그는 성인이 된 후 투표권을 꾸준히 행사해왔다. 관심 있는 분야도 여느 청년처럼 부동산, 주식과 환경문제 등이다. 그에게 선거란 사회에 소속감을 느끼는 계기였다. 김씨는 “집으로 온 선거 공보물에 이름이 있으면 ‘아, 나 대한민국 국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선거 공보물을 받았을 때 한국어이긴 하지만 어려운 말이다 보니 이해가 잘 안 됐다.” 베트남에서 귀화한 정희진씨(가명·30)는 한국에서의 투표 경험을 이같이 돌아봤다. 그는 2014년 한국으로 온 결혼이주여성이다. 통역을 할 정도로 한국어를 충분히 잘하지만, 선거 공보물에 적힌 어휘는 여전히 낯설다. 정씨는 “(결국) 얼굴을 보고 고르거나, 남편을 따라했다”며 “베트남어와 다른 외국어로도 정보를 제공하는 링크나 검색 서비스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경기 안산 다문화특구 / 안산시 제공

경기 안산 다문화특구 / 안산시 제공

공약이 비어 있다

한국의 유권자가 다양해지고 있다. 정희진씨처럼 이주 1세대 중 귀화한 이들과 김민지씨처럼 청년기에 접어든 2세대, 장차 청년이 될 다문화학생(16만56명·2021년 교육기본통계)까지 고려하면 다문화 배경을 가진 유권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다문화학생은 이미 전체 학생의 3%를 차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연구나 정책마다 ‘다문화’의 분류가 제각각인 탓에 정확한 규모를 집계하긴 어렵지만, 지방선거에서의 규모로 가늠해볼 수는 있다. 지방선거에선 영주자격 취득 후 3년이 지나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2018년 지방선거의 외국인 선거권자는 10만6205명으로 2006년 6726명에 비해 급격히 증가했다.

하지만 가장 큰 정치 이벤트인 선거에선 다문화 사회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국민의 대표’를 뽑는 총선의 공약을 보면 다문화 사회가 실감되지 않는다.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이 많은 20대 지역의 총선 공약을 분석한 논문 ‘한국의 다문화 매니페스토에 대한 분석: 18대-20대 총선을 중심으로’를 보면, 다문화 사회에 대한 정치의 ‘반응성’은 낮다. 18대 총선에서 다문화 관련 공약은 8개에 그쳤다. 이후 19대 34개, 20대 37개로 늘어나긴 했으나 논문은 “만약 20위를 벗어나는 지역의 다문화 반응성을 측정했다면 아주 낮아졌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연구를 진행한 정회옥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매니페스토(공약)는 후보자가 국민에게 하는 약속으로, 변화하는 사회에 얼마나 반응성이 있는지를 간결히 보여준다”며 “정치가 변하는 속도가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양 정치권(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다문화에 관심이 많지 않은 것”을 그 이유로 꼽았다. 실제 정당별로 제시된 공약의 수로 봤을 때 특정 정당이 다문화 이슈를 선점했다고 보기 어렵다. 정 교수는 “순혈주의, 결혼이주여성을 ‘아이를 낳아주는 존재’로 보는 가부장적 관점도 다문화 반응성을 늦어지게 한다”고 말했다.

공약의 질적 측면에도 한계가 보인다. 18대 총선에선 다문화 체험지구 조성, 유엔마을 만들기 등이 제시됐고 19대에는 다문화 축제 개최, 다문화 교육지원센터 건립 추진 등이 나왔다. 20대에는 다문화 특화 문화지구 조성으로 관광객 유치, 다문화 음식축제 등이 등장했다. 정 교수는 “초보적인 단계로, 서비스형, 행사형의 일방적이고 시혜적인 정책이 주를 이룬다”라고 평했다.

다문화 배경을 가진 정치인 또한 드물다. 지방의회에선 경기도의회에 몽골에서 귀화한 이라 의원이 있었고, 19대 국회엔 이자스민 의원이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비례대표로 입성했지만 이후 맥이 끊겼다. 현 21대 국회엔 결혼이주여성이나 이주노동자 출신 의원은 없다. 민주당이 원옥금 이주민센터 동행 대표를, 정의당이 이자스민 전 의원을 영입했지만 당내 경선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자스민 전 의원은 정치적으로 뭉치기 어려운 현실을 짚었다. “지역구로 출마할 경우 이주민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 보니 힘을 받기가 어렵고, 비례대표로 가더라도 다문화 배경 유권자의 정당 가입이 적기 때문에 경선에서 힘들다”는 것이다.

정책 바깥에 선 다문화청년

정치는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논하는 영역이다. 정치에서의 ‘과소대표’ 혹은 ‘미대표’는 정책의 공백, 지원의 공백으로 이어진다. 현재 다문화 정책은 주로 아동·청소년기 지원에 머물러 있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빠진 결과 한국사회 적응을 위한 ‘가교’가 놓이다가 말았다. 청년이 된 이들은 한국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암호 풀듯 알아가야 한다.

휴학 중인 대학생 김민지씨는 성인이 되면서 “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중고등학교까진 학교에서 알려주는 것이 많았는데, 대학에 가다 보니 정보를 스스로 찾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를 비롯한 다문화청년들은 부동산을 예로 들면 청약 통장 만들기, 집 구할 때 주의점 등 너무 당연해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한국사회의 ‘암묵지’ 같은 것을 알아내기가 어렵다고 했다.

다른 청소년들처럼 대입을 준비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열일곱 살에 중도입국한 박승민씨(가명·25)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그가 다녔던 다문화 대안학교에서는 대학 입시가 아닌 한국 적응에 초점을 맞췄다. 박씨는 “이력서를 쓸 때도 차이가 너무 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일을 하며 사이버대학에 재학 중이다.

박씨는 대학을 마친다 하더라도 일할 분야가 제한적이라고 본다. 박씨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에서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인 5급(전문 분야에서의 연구나 업무에 필요한 언어 기능을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음)에 해당하지만 차별을 받는다. 억양 때문이다. 그는 취업 문의 전화를 했을 때 상대방이 바로 끊어버리는 일을 여러차례 겪었다. 박씨는 “두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만, 능력이 아니라 발음 때문에 면박을 받으면 자존감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의 주변 다문화청년들의 직업군은 시간제 아르바이트, 식당이나 공장 노동자 등으로 다양하지 않다. 박씨는 “베트남 출신 청년 중에서도 변호사, 의사 같은 직업이 점점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다문화청년이 겪는 교육을 세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들이 의무교육을 받고도 대입이나 취업에서 배제될 이유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문화청년의 자기정체성과 평생교육 실태를 연구한 김진희 한국교육개발원 평생·융합교육연구실 연구위원은 이들이 “한국사회 적응 기제, 경제적 여건, 사회적 관계망 등에서 ‘다중 격차’와 ‘이중화’의 고리 속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소득, 자산, 교육, 주거, 문화 등 다차원적 영역에 걸쳐 불평등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다문화청년 20명과 지역 현장활동가 12명을 면담·분석한 결과 “다문화청년에게 자존감을 비롯한 탄력성이 있으면 어떤 (차별적인) 질문이 와도 넘길 수 있는데, 상처나 트라우마로만 남기면 도피나 체념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김 연구위원은 실력을 가진 2세대를 길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문화학생들이 우리나라의 장·차관이 될 수 있다고 보나’란 질문에 대한 답을 ‘그렇다’로 바꿔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문화청년들은 대학에 가서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위축되기도 한다. 이들의 중퇴율은 조사가 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들이 정말 양질의 인력으로 키워지느냐, 건강한 시민이 되느냐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다문화청년이 가진 다양성의 뿌리를 높이 사야 한다. 글로벌 인재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우리 안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을 배제하는 것은 맞지 않다. 다문화청년은 동료 시민”이라고 말했다.

이자스민 전 의원은 ‘동일하지 못한 출발선’을 감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문화가족지원법에선 아동·청소년을 24세 이하인 사람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다문화청년은 25세부터는 정책과 통계의 바깥에 존재하게 된다. 최근 당정이 발표한 청년종합대책에도 별도 분류되지 않았다. 이 전 의원은 “같은 스무 살이라고 해도 다문화청년과 그렇지 않은 청년은 다른 상황에 놓이기 때문에 동일한 생애주기로 지원하면 안 된다. 특성에 맞는 ‘스텝 바이 스텝’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왼쪽부터 이자스민 전 새누리당 의원, 이라 전 한나라당 경기도의원, 원옥금 이주민센터 동행 대표 / 권호욱·김영민 선임기자

왼쪽부터 이자스민 전 새누리당 의원, 이라 전 한나라당 경기도의원, 원옥금 이주민센터 동행 대표 / 권호욱·김영민 선임기자

다문화 출신 리더의 필요성

“다문화가정을 경험한 사람이 직접 정책에 참여하고 법을 제정하는 데에 힘써야 한다. 저보다 어린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다문화 정치인이 꼭 필요하다.” 김민지씨의 말이다. 박승민씨도 자신과 같은 이주민 출신 정치인이 나온다면 “정치에 더 관심도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결혼이주여성이 부녀회장이나 주민대표를 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앞으로 작은 단위의 지자체부터 시작해 점점 다문화 출신 리더가 나오리란 전망도 어색하지 않다.

한국사회가 과연 피부색과 출신이 다른 정치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가란 질문이 남는다. 이미 한국은 ‘우리 안의 이중성’을 마주한 전례가 있다. 과거 이자스민 의원의 경우 그가 ‘필리핀 며느리’이자 ‘완득이 엄마’로 있을 땐 호평을 받았다가 국회에 가고 나서 비난을 받았다. 정회옥 교수는 이를 “이주민이 우리보다 낮은 지위에 있을 땐 아무렇지 않아 하다가 권력을 잡게 되면 거부감을 느끼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즉 “시혜하고 동정할 수 있는 위치에 두는 건 괜찮지만 동등해진다거나 앞서가는 건 못 봐주겠다는 인식”이란 것이다. 해외에서 한국계 정치인이나 장관이 탄생하면 환호를 보내면서 한국 내 다문화 정치인은 경계하는 것 또한 이중성의 한 축이다. 정 교수는 “정치권에서 성공한 롤모델이 나온다면 다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한 롤모델이 나올 수 있을까. 이자스민 전 의원은 “경선을 할 때 청년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처럼 이주민에게도 배려가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힘 같은) 큰 정당에선 의지와 결정만 있다면 언제든지 이주민 대표가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직접 정치에 나섰던 의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국회에서 나온 이후 기사에서 ‘다문화’란 단어가 나오는 빈도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정부·사회·언론의 관심, 누가 대표로 있고 없고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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