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주어’ 없는 유감 표명···윤 대통령, 과거사 ‘나홀로 청산’

박은경 기자

과거사 관련 기존 입장 되풀이 한 기시다 총리

“마음 아프다” 개인적 표현엔 주어 빠져

윤석열 대통령과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한일 정상 확대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과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한일 정상 확대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7일 열린 한·일 정상회담은 3월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 이후 한 달 반 만에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답방으로 성사된 셔틀외교 복원이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기시다 총리는 기존 입장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않은 채 물 컵의 반잔을 그대로 비워뒀다. 양국 간의 가장 큰 문제인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허술한 토대 위에서 윤 대통령 홀로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진다”는 식으로 끌고 가는 한·일 외교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진다.

기시다 총리는 진정성 있는 사과나 유감 표현은 나오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는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해 역대 일본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지난 3월 밝힌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에는 ‘위안부’ 범죄를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 일본의 식민지배·침략을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1995), 식민지배 강제성을 사죄한 간 나오토 담화(2010)도 포함되지만 반성과 사죄를 모두 뺀 아베 담화(2015)도 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핵심인 ‘통절한 반성과 사죄’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 범위를 넓게 해석하면 2021년 일제 강점기에 이뤄진 강제노동을 부정한 각의(내각회의) 결정까지 포함될 수 있다.

그는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고 했는데 ‘개인적 생각’을 전제로 한데다 주어를 적시하지 않아 한국인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표현인지도 불분명하다. 당시에는 다수 일본인들도 강제 징용돼 탄광 등에 노동자로 투입됐기 때문이다. 강제성 부분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실 관계자는 “앞으로 말과 행동으로 과거사에 대해 진정성 있는 행보를 이어가겠단 표현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의 핵심으로 꼽히는 일본 피고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 일본제철의 참여 여부도 거론되지 않았다.

오히려 윤 대통령이 나서서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과거사에 대한 ‘나홀로 청산’을 이어갔다. 윤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를 두고 “양국이 과거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으면 미래 협력을 위해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다는 인식에서는 벗어나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또 강제동원(징용) 해법 방침이 바뀔 가능성을 묻는 일본 기자의 질문에 대해 “(강제동원) 해법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과 2018년 대법원 판결을 동시에충족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면서 “과거사 인식 문제는 진정성이 중요하지 어느 일방의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당초 올해 여름쯤 이뤄질 것으로 전망됐던 기시다 총리의 답방이 빨리 성사된 것은 윤석열 정부의 외교력이 아니라 기시다 총리의 의지 때문이다.

앞서 산케이신문도 “기시다 총리가 조기 방한을 고집했다”면서 “윤 대통령의 결단에 호응하려 의도”라고 보도했다. 이번 방한은 이달 19일부터 21일까지 일본 히로시마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릴 한·미·일 정상회의와 3국 협력 강화 움직임에 맞춰 사전에 한·일 관계 개선 모습을 보이려는 정치적 의도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 대통령의 한·일관계 개선 노력을 높이 평가한 점도 일본으로서는 무언의 압박으로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윤 대통령은 이번 방한의 의미를 “정상 간 셔틀 외교 복원됐다”, “양국 관계 정상화가 궤도에 올랐다”는 평가를 적극적으로 쏟아냈다.

윤 대통령의 대일 외교 방식인 ‘선양보 후호응’ 원칙을 지켜본 중국 등 주변국들도 이를 자국에도 적용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외교적 공간은 더 협소해질 수 밖에 없다. 미·중 갈등 심화, 한·미·일 협력 강화에 따른 중국의 반발,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을 둘러싼 러시아와의 갈등 등 복잡하게 얽힌 국제 이슈 속에서 국익 중심의 외교 정책을 펼치기는 더 어려울 수 밖에 없다는 우려가 커진다.

윤 대통령은 지난 3월21일 대국민 담화성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한국이 선제적으로 걸림돌을 제거해 나간다면 분명 일본도 호응해 올 것”이라고 밝혔다. 선제적 양보에 대한 일본의 호응을 촉구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홀로 외교’에 대한 책임은 결국 윤 대통령이 져야 한다. 과거사 문제 해결에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분야에서 조차 ‘빈손 외교’가 반복된다면 정부는 신뢰를 잃을 수 밖에 없고, 그만큼 윤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부담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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