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창작의 의지를 꺾는 자, AI의 지배를 받을지니

박주용 교수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20)창작의 의지를 꺾는 자, AI의 지배를 받을지니

확률적으로 ‘최적화’된 영화를 만들어내는 AI기술의 눈부신 발전
그러나 이 창작물이 인간에게 공감과 감동을 주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척박한 사막에서 사구와 싸우며 우주적 영웅담을 만들어내는 ‘듄 우주’의 시민들처럼
창작하는 인간 ‘호모 크레안스’를 넘어설 기계지능은 나타날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SF 소설가 프랭크 허버트(Frank Herbert·1920~1986)는 1957년 미국 북서부 오리건 사구(Oregon Dunes)를 찾아갔다가 본인의 표현으로 “도시, 호수, 강, 그리고 고속도로를 한입에 삼켜버릴 만한” 가공할 위력에 깊이 감동하게 된다. 그 느낌과 구세주(메시아) 개념을 핵심으로 하는 주요 종교들의 서사에서 사막이나 황무지 같은 척박한 환경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를 토대로, 억압적인 봉건적 사회제도와 생태환경, 첨단 과학기술과 신비주의적 의례가 엮인 영웅담을 구상하게 된다.

오랜 노력 끝에 나온 결실이 바로 1965년 발간된 <듄(Dune)>이라는 소설이고, 후에 나온 다섯 편의 후속작을 엮어 <듄의 우주(the Dune universe)>가 완성된다.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디뎌도 거대한 사막 지렁이에게 잡아먹히고 땀 한 방울조차 버릴 수 없이 소중할 정도로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는 사막. 그곳의 수많은 사구들은 아버지를 암살하고 자신의 가문을 멸망시키려는 황제와 숙적 일족의 추격으로부터 필사적으로 탈출해 살아남아야 하는 힘없는 어린 주인공 폴 어트레이디즈(Paul Atreides)가 훗날 전 우주를 뒤흔드는 영웅으로 등극하기 위하여 풀어야 할 인생 수수께끼의 상징이 되어 줄곧 그를 위압한다.

소설 <듄>의 전반부를 영화화한 2021년판 <듄(Dune)>이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끈 사실은 필자에게도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듄> 시리즈를 읽은 후 행성 하나를 뒤덮은 끝없는 사막을 배경으로 자연과 인간, 첨단 과학과 신비가 대립하는 투쟁을 끝끝내 승리로 이끌어가는 폴의 행적이 그려지는 긴박감과 거대한 스케일의 감동을 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듄>의 화면을 가득 채운 사막은 소설만큼이나 주인공이 생존 해법을 그려나가는 거대한 캔버스였고, 척박한 환경과의 불협화음에서 화음을 끄집어내어 기록하는 오선지로써 분위기를 잘 나타냈다. 그리고 폴은 크고 작은 스케일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극복해내야 할 생존을 위한 도전들을 극복하며 자신의 길을 닦아가는 창의적인 영웅으로서 잘 묘사되어 있었다. 대서사의 영화가 줄 수 있는 감동을 생각하며 오늘은 영화로부터 알 수 있는 ‘창작하는 인간’-호모 크레안스(Homo Creans)-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우리는 어떤 분야에서 현대의 인공지능(AI)과 같은 신기술이 어떻게 쓰이는가 질문을 받을 때 주로 그 기술의 경제성(상품성)이나, 그 기술로 해결되는 특정 문제에 대한 설명으로 대답하곤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AI는 유통, 의학, 안면 인식 등 축적된 기존 데이터를 학습하여 정해진 패턴을 찾아내는 ‘인간 모방’ 영역에서는 실로 큰 경제적·사회적 영향을 끼치고 있으나 인간의 창의성이 작동하는 창작 영역에서는 그 수준의 활약을 아직은 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영화 제작처럼 복합적인 다단계 작업에서는 단계별 일의 성질에 따라 AI가 활용되는 정도에도 큰 차이가 난다.

영화 제작은 대본 선정·자금 조달·배우 섭외·촬영 계획 수립 등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과 그래픽스·애니메이션·특수효과·소리 입히기·색보정 등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으로 나뉘는데, 영화 제작의 60% 정도를 차지한다는 프리보다는 포스트 과정에서 AI의 활약이 더 두드러진다. 마블의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빌런 타노스의 몸통과 얼굴 배우 조시 브롤린의 미세한 표정 연기를 어울리게 하기 위하여 AI 기반 렌더링(rendering·그래픽 만들기) 기법을 사용했는데, 배우와 수동으로만 작업했다면 수주일 걸렸을 일을 몇 시간 안에 해냈다고 한다. AI는 이렇게 화면의 자동적 개량 작업에서 많이 활용되는데, 영상이 얼마나 부드럽게 흘러가는지 결정하는 초당 프레임수(FPS·Frames Per Second)나 각 프레임이 얼마나 또렷한지를 결정하는 해상도를 자동 증가시키는 기술들이 각각 ‘데인’(DAIN), ‘어스갠’(ERSGAN)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 기술들이 사용된 영상은 온라인에서 ‘1906 San Francisco market video’로 찾으면 볼 수 있다. 또한 IBM의 AI 엔진 왓슨(Watson)이 <모건(Morgan)>이라는 영화를 축약하여 스스로 예고편을 만들어냈다고 발표하면서 세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 일도 있었는데, 이의 실상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조금 더 이야기해볼 것이다.

이처럼 수동으로 할 작업을 고속으로 자동화시키는 데 주안을 두는 포스트와 달리 프리프로덕션에서 AI의 활용 목적은 ‘인간 주관성의 개입’을 줄여 성공 가능성이 높은 영화를 기획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시나리오 분석, 캐스팅 참여, 국내외 시장 트렌드 발견 등 기존 영화 데이터를 기계적으로 분석하여 패턴을 찾는 데 노력이 집중되어 있다. 수만개의 영화 시나리오와 성적을 분석한 다음에 새 시나리오의 성공 가능성을 따지고 영화의 평점과 관객수를 예측하는 알고리즘이 여럿 나와 있다. 하지만 인간이 창작하고, 인간이 즐기는 영화에서 ‘주관성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과연 영화 발전에 있어 올바른 방향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사람이라는 요인을 제거하고 과거 데이터와 계산에만 의존하는 게 영화산업에서 최선이라면 어떻게 전례 없는 새로운 것이 나타나 혁신과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또한 영화를 만들고 보는 것은 사람인데, 사람 없이 만들어진 영화가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20)창작의 의지를 꺾는 자, AI의 지배를 받을지니

사람들에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면 절대다수가 이야기(스토리)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앞뒤가 잘 맞고 군더더기 없이 ‘결이 맞은(coherent)’ 이야기를 좋은 것으로 친다. 과연 AI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어떤지를 2016년 영화제작자 오스카 샤프(Oscar Sharp)와 AI 연구자 로스 굿윈(Ross Goodwin)이 만든 ‘벤저민(BENJAMIN)’이라는 AI 알고리즘이 쓴 <선스프링(Sunspring)>이라는 영화로 살펴보자. 시간에 따라 변하는 ‘시계열 데이터’를 학습하는 데 특화된 순환신경망(RNN·Recurrent Neural Network) 기법을 사용해 만들어진 이 영화(온라인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는 다음처럼 시작한다.

남자 1: 대량 미취업의 미래에서 젊은이들은 피를 팔 수밖에 없어(In a future with mass unemployment, young people are forced to sell blood).

여자 1: 가서 남자아이 하나 만나보고 입을 다물어. 백살까지 살게 될 것은 나였어(You should see the boy and shut up. I was the one who was going to be a hundred years old).

[남자 1이 눈깔을 토해낸다.]

남자 2: 글쎄, 난 해골한테 가봐야겠다(Well, I have to go to the skull).

시작부터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은 대사로 이루어진 이 시나리오에서 결이 쉽게 찾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든다. 이를 두고 외국의 한 평론가는 이것이 무의미한 난센스인지, 잊혀졌다가 새로 발견된 타르콥스키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넋두리를 하였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Андрей Тарковский·1932~1986)는 러시아(소련) 출신으로 인간의 영혼과 기억, 의식과 자연의 투영 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를 느리고 긴 연속촬영, 몽환적인 영상으로 그려내 한 번에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영화 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을 만든 거장이다.

벤저민과 타르콥스키의 작품이 공히 난해하다는 평을 받았는데, 왜 AI가 만들면 ‘결이 맞지 않은’ 난센스로 치부되고, 유명 인간 감독이 만들면 ‘관객이 결을 찾기 위해 힘쓸 가치가 있는’ 예술작품이 되는 것일까? 이 질문은 AI와 인간의 창작이 어떻게 본질적으로 다른지, 또는 작품의 예술성이란 창작자가 작품 안에 넣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창작자가 의도하였든 하지 않았든 관객이 찾아낼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예술의 본질에 관련된 아주 깊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올바로 대답하기 위해선 창의성, 아름다움, 예술성, 이야기의 결맞음 같은 고차원적 개념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할 텐데 이것은 기회가 닿는 대로 차차 깊이 탐구해보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AI의 창작이 인간의 그것과 비교해 어느 수준까지 와 있는지를 알려주는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해본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는 IBM 왓슨이 자동으로 만들어낸 영화 <모건> 예고편의 실상이다. 전술했다시피 언론들은 ‘AI가 영화를 (리)메이크하다’ 같은 표현을 써가며 영화에 새로운 창작 패러다임이 등장한 듯한 충격을 전했지만, 그 예고편 제작에 참여한 사람은 “왓슨은 화면을 배열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였고, 여전히 인간의 개입이 필요했다”고 단언했다. 즉 AI 창작의 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AI를(또는 어떠한 신기술이든) 인간이 창작하는 데 쓰이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기며, 앞으로도 인간이 없는 창작은 어려울 것이라는 데 입을 모으고 있다.

AI가 계속 발전하여 창작 과정에 조금씩 더 참여하게 된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창작하는 인간, 호모 크레안스와의 결정적 구별점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창작이란 머릿속에 그려지는 풍경, 귓가에 맴도는 음상(音想), 말로 표현되기 위해 요동치는 시상(詩想)을 캔버스, 오선지, 흰 종이 위에 채워나가고 싶은 욕망,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해내는 실행력, 그리고 세상에 보여주고 역사에 남기고 싶은 의지가 관여하는 총체적 과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 없이 입력된 데이터로부터 글자를 뽑아 내뱉은 AI 벤저민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동기가 생길 것 같은가? 반대로 대척점에서 서 있는 인간 타르콥스키의 작품 속에서 관객들은 의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을 AI와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하는 ‘인간다움’이 있는지, 또 있다면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최종적인 정답을 안다고 자신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와 관련하여 우리가 되새겨볼 만한 이야기가 소설 <듄>의 초반에 나온다. <듄>의 우주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human)’, 그리고 사고 능력을 상실한 ‘사람의 무리(people)’. 인류가 그렇게 둘로 나뉘게 된 계기는 사람의 사고를 대신 해줄 수 있는 AI의 출현이었다고 한다. 귀찮고 머리를 아프게 하는 힘든 생각 따위는 AI에게 맡겨버리는 편리한 길을 택한 ‘무리’들은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AI를 조종하는 사람들에게 조종당하는 하층민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그래서 인류의 미래 지도자이자 메시아로 여겨지던 폴의 첫 시련은 그가 진정한 인간인지 생각 없는 무리의 하나인지 시험받는 것이었다. 척박한 사막에서 사구와 싸우며 우주적 영웅담을 만들어내어 <듄> 우주의 시민들, 그리고 그것을 읽는 우리들에게도 감명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진정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 어떠한 기계도 최고의 호모 크레안스를 넘어서지 못할 것 같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남의 지배 아래에 제 발로 들어가지 않은 인간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박주용 교수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20)창작의 의지를 꺾는 자, AI의 지배를 받을지니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네트워크과학·복잡계과학으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데이나-파버 암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시스템스 생물학을 연구하고,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와 예술의 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제주도에 현무암 상징물 ‘팡도라네’를 공동 제작·설치했고, 대전시립미술관의 ‘어떻게 볼 것인가: 프로젝트 X’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창시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남는 시간에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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