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외우고, 정해진 답 빠르게 도출…챗! 너 ‘한국형 천재’였구나

이종필 교수

(39) 한국 교육 인재상과 쏙 빼닮은 ‘챗GPT’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2016년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의 대결에서 4 대 1로 완승을 거두었을 때,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제 ‘한국형 천재’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고 얘기하곤 했다. 한국형 천재란 암기 잘하고 선행학습 잘하고 정해진 정답을 잘 찾는 인재이다. 학력고사 세대인 나도 한국형 천재가 교육의 목표였던 시대를 살았다. 알파고 이후로는 세태가 많이 나아졌으려나 싶었는데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생명과학Ⅱ 20번 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돌이켜보면 근본적으로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다. 당시 20번 문항 자체가 잘못 설계돼 과학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을 제시했다는 이의 제기에 대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는 “이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학업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의 타당성은 유지된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문제 자체에 하자가 있더라도 ‘변별력’만 작동하면 괜찮다는 얘기이다. 여전히 전제와 과정의 합리성은 무시되고 오직 결과만 중시하는 한국 교육의 단면이 여실히 드러난 사례였다.

암기 잘하고 정해진 답을 빨리 찾는 능력은 사실 그 자체로 대단한 능력이긴 하다. 그 능력이 가장 필요할 때가 언제일까 생각해 보면 윗사람이 궁금한 게 생겼을 때이다. 결정권이 있는 사람이 궁금한 것이 생겨 주변에 물어봤을 때 가장 빨리 답할 수 있는 사람, 아마도 한창 산업화를 진행할 때에는 그런 ‘한국형 천재’가 꼭 필요했을 것이다. 모든 교과서와 모든 참고서와 모든 사전을 짊어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 모든 것을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는 사람이 분명 쓸모가 있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빠른 추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분명 한국형 천재의 역할이 있었다.

그러나 정해진 답만을 찾는 사람들은 정답이 없는 문제 앞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심지어 새로운 규칙을 찾거나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난감할 것이다. 한국에서 노벨 과학상이 아직 나오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우리는 단지 남이 설정해 준 문제를 잘 풀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래서 수능 생명과학의 20번 문항에서처럼 문제 설정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중요한 ‘변별력’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선진국에서, 윗사람이, 또는 평가원이 던져준 문제만 잘 풀면 되는 인재, 아직도 우리는 그런 한국형 인재를 키우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한국형 천재가 나타난들 위키피디아나 네이버 지식인을 이길 수는 없다. 그야말로 포클레인 앞에서 삽질하는 형국에 불과하다.

2007년 아이폰의 등장은 세상을 크게 뒤집었다. 요즘 학생들 중에 책가방에 어학사전을 넣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적지 않은 학생들은 전공교과서도 잘 안 들고 다닌다. 수많은 교과서와 교양서적과 어학사전을 머리에 집어넣고 다닐 필요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왜 우리가 추구하는 인재형은 여전히 그런 능력을 가져야만 할까? 그때부터 이미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지식을 넣고 다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더 정확하고 빠르게 효율적으로 원하는 정보를 수집해 필요에 맞게 큐레이팅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이런 시대에 과연 책과 스마트기기를 봉쇄해 두고 단기간에 머릿속에 쑤셔 넣은 지식의 양을 측정하는 각급 단위의 시험이 대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질문의 의도에 부합하는 답 제공
연속적 질문으로 풍성한 결과도

놀라운 능력 때문에 벌써부터 논란
학교선 ‘챗GPT 금지’ 두고 골머리
이미 학계에선 논문 저자로 등장

작년 말에 등장한 미 오픈AI사의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는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챗GPT와 몇 번 대화를 해 본 나의 첫 감상은, 한국 교육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았던 인재상이 이렇게 대화형 인공지능으로 모습을 드러냈구나, 라는 생각이었다. 일부 전문적인 질문에는 답이 틀리거나 너무 포괄적이어서 정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는 내용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는 평균 이상의 수준이었다. 내 주변의 뛰어난 전문가들을 찾아가 질문을 하더라도 (그 자체가 일단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분야에 걸쳐 일정 수준 이상의 답변을 짧은 시간 안에 얻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기존의 뛰어난 검색엔진들은 수많은 검색의 결과만 나열해 줄 뿐이어서 그 속에서 다시 내가 원하는 정보를 추리는 일은 오직 나의 몫이었다. 그러나 챗GPT는 내 질문의 의도에 부합하는 답을 요약해서 정리해 준다. 이뿐만 아니라 연속적인 질문으로 보다 풍성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게 바로 한국형 천재 아닌가!

챗GPT의 놀라운 능력 때문에 벌써 적잖은 논란이 터져 나오고 있다. 당장 학교에서는 챗GPT를 금지할 것인지, 그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할 것인지를 두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곧 개강해 과학기술글쓰기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 나로서도 무척 난감하긴 마찬가지이다. 이미 학계에서는 챗GPT가 저자로 들어간 논문도 등장했다. 학술지에서는 일단 저자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는 논란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그러나 기술 발전의 방향은 너무나 확실하다. 챗GPT의 근간을 이루는 자연언어 처리모형인 GPT3의 매개변수는 1750억개인데 올해 공개될 GPT4의 매개변수는 100조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 숫자는 인간 뇌의 시냅스 개수와 맞먹는다. 게다가 문자 말고도 사진이나 영상 등의 정보를 인식하거나 인터넷에서 검색하는 기능까지 추가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닐까? 상황이 이렇다면 지금 챗GPT가 초래할지도 모르는 혼란에 겁을 먹기보다 챗GPT 또는 그 이상의 인공지능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지 그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것이 더 현명하다.

머지않아 ‘인공지능 과학자’가
인간과 협업하는 날 오지 않을까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기대 커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챗GPT 이후에 거는 기대가 크다. 과학 활동은 일정한 범위에서 제한된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큰 역할을 할 여지가 많다.

지금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는 추세대로라면 머지않은 미래에 인공지능 과학자가 인간 과학자와 높은 수준의 협업을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이미 딥러닝 기술을 활용해 실험 결과를 분석하고 단백질 구조를 탐색하고 신약을 개발하는 데에 도움을 받고 있다. 챗GPT를 포함해 이렇게 부분적으로 특출한 능력이 계속 발전하면서 하나로 집중돼 통합된다면 어떤 놀라운 능력을 보여줄지 매우 기대된다. 일단 케플러가 관측 자료로부터 행성운동의 법칙을 유도한 것 같은 귀납적인 분석은 인공지능이 월등한 역량을 발휘할 것이다. 어쩌면 인류가 지금까지 지상과 우주에서 축적한 수많은 관측 자료들(말 그대로 빅데이터)로부터 미래의 인공지능이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경험법칙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이미 일부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지구에서 태양과 화성의 위치를 관측한 데이터로부터 코페르니쿠스의 결과를 내기도 했다.

앞으로 한동안 인간만의 능력으로 남아 있을 분야가 있다면 아마도 가설을 설정하고 모형을 만드는 작업이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말하자면 어떤 패러다임의 뼈대를 세우는 초기 설정 단계로서 한국형 천재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 지점이 지금의 인공지능과 대별되는 인간만의 창의성이 시작되는 곳일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인공지능이 가설 설정의 장벽을 넘어선다면, 그래서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과학이론을 제시하고 옳은 것으로 증명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그때는 16~17세기의 과학혁명에 버금가는 또 다른 과학혁명의 시작점이지 않을까? 그때는 인간 과학자의 주된 역할이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법칙과 이론을 따라가면서 이해하는 것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마치 지금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의 기량이 너무나 출중해 인간 바둑기사들이 그 뒤를 따라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너무 우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공지능이 등장한 뒤에 결국 인간의 바둑 실력도 엄청나게 늘었기 때문이다. 과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떻게든 자연의 숨겨진 원리를 알게 된다면 그 자체가 과학자들에겐 큰 기쁨이다.

가끔 과학자들은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문명의 외계인과 조우해 그들로부터 그들의 과학을 배우는 상상을 하곤 한다. 인공지능 과학자는 말하자면 적어도 과학 분야에서 그런 외계인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초지능 외계인과의 조우가 두려운 이유는 인간이 지금까지 지구에서 누려왔던 ‘유일자(The One)’의 지위에서 내려와 여럿 중 하나에 불과한 ‘평범자(One of them)’가 되기 때문이다. 고도의 인공지능이 출현한다면 그 또한 우리에게 ‘평범자’의 굴욕(?)을 선사할 것이 분명하다. 챗GPT를 보면서 나는 이제 우리도 그 굴욕의 시간을 서서히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훌륭한 AI 과학자가 탄생하려면
양질의 데이터 확보량이 관건
고급 논문이 미래 희토류 될 수도
국가 차원 데이터 확보 서둘러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사의 반영이라는 점이다. 훌륭한 인공지능이 탄생하려면 방대한 매개변수가 알고리즘 수준에서 효율적으로 작동해야겠지만 이를 학습시키는 양질의 데이터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도 큰 관건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그 디지털 흔적이 어떻게 남느냐가 우리 인공지능의 미래를 결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훗날 탄생할 ‘AI과학자’를 학습시킬 양질의 자료를 우리가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이 점에서는 대형 학술지 출판사나 예비논문 저장소를 보유한 나라가 절대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최근 논문에 대한 공개 접근 정책이 확대되는 추세이긴 하지만, 만약 학술논문들이 인공지능 발전의 중요한 자원으로 인식된다면 고급논문들이 미래의 희토류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공지능을 둘러싼 국가 간 패권경쟁이 치열해진다면 ‘논문의 희토류화’는 과학자들의 오랜 공유의 미덕을 압도해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인공지능을 학습시킬 양질의 데이터를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확보하는 작업에 당장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전환의 시대에서는 무엇을 하려고 하더라도 일단 방대한 디지털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다. 챗GPT의 시대도 예외는 아니다.

▶이종필 교수

[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잘 외우고, 정해진 답 빠르게 도출…챗! 너 ‘한국형 천재’였구나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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