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팔자? 주사위 놀음? ‘인생 스포일러’ 그냥 따를까, 돌파할까

이종필 교수

(38) 신년운세와 자유의지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생년월일시로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사주명리학의 큰 틀은 ‘결정론’
이 세계관은 놀랍게도 과학의 대명사인 뉴턴역학과 똑같다

누군가는 환상과 착각이라지만 ‘자유의지’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힘
사람 많은 곳 피하라는 말보다 안전조치 강화가 합당하듯이
초자연적 힘에 기대는 건 사람의 노력을 다 쏟은 뒤에도 늦지 않다

“올해 계묘년은 나무목(木)에 해당하는데 선생님 사주에는 쇠금(金)이 많아 돈을 많이 버시겠네요.”

며칠 전에 만난 지인이 새해 인사차 내게 이렇게 덕담을 건넸다. 취미 삼아 잠시 공부했다는 사주명리학으로 나의 새해 운세를 풀어준 것이다.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사주명리학의 해설을 듣는 모습이 어색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 편이다. 과학자들 중에는 특정 종교에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신자들도 많지 않은가. 나는 종교도 없을뿐더러 정기적으로 종교시설을 방문하거나 돈을 내지는 않는다. 다만 30대에는 나름 먹고사는 게 힘들어 동네 용하다는 역술인을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때 어느 역술인의 말씀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또 다른 분은 내게 40대부터 30년 대운이 들 것이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좋은 시절이 올 것이라고 했다. 이제 만 나이로도 50을 훌쩍 넘은 시점에서 돌아보자면, 지난 10여년이 불행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숱한 실패와 좌절의 이력이 많아 대운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은 분명하다.

1년쯤 전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일 때 윤석열 후보의 선거캠프에서 법사님이 중책을 맡고 있다는 보도가 세간의 화제였다. 부인 김건희 여사는 어느 언론인과의 통화에서 자신은 영적인 사람이라 도사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고도 했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의 국정철학이 주술이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졌다. 아직도 석연치 않은 집무실 용산 이전이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장례식 때의 조문 생략 일화를 두고도 주술과 엮인 소문이 횡행했다. 모두 대통령실의 해명이 상식과 이치에 맞지 않아 일반 국민들이 쉽게 납득할 수 없으니 그런 허황된 해석이 힘을 얻은 것이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정말 윤석열 정부의 국정에 주술가들이 큰 영향을 끼친다면 일반론을 넘어선 문제가 생긴다. 당장 작년의 10·29 참사나 북한 무인기의 서울 상공 침투를 막지 못했으니, 미처 몰랐다면 그 도력이 가짜인 것이고 미리 알았다면 왜 대처하지 않았냐는 더욱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사주명리학의 큰 틀은 결정론이다. 한 사람이 태어난 생년월일시에 여덟 글자(八字)를 부여해 그로부터 그 사람 인생의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구조이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어떤 시스템의 초기 조건이 정해지면 이후 그 시스템의 미래가 정해지고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 결정론적 세계관이다. 놀랍게도 이 세계관은 과학의 대명사인 뉴턴역학의 세계관과 똑같다. 어떤 물체의 처음 위치와 초속도를 알고 그 물체에 작용하는 모든 힘을 다 안다면 임의의 시간에 그 물체가 어느 위치에서 어떤 속도로 운동하는지 뉴턴역학은 정확하게 알려준다. 사실 우리가 ‘과학’에 대해 갖고 있는 심상은 대체로 뉴턴식의 결정론이다.

뉴턴역학은 18~19세기 프랑스에서 수학적으로 더욱 세련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당대 최고의 수리물리학자였으며 나폴레옹의 교관이기도 했던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는 뉴턴역학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최대한으로 확장시켜 우주의 삼라만상을 ‘원리적으로는’ 결정론적 방식으로 명징하게 알 수 있다고 선언했다. 여기에는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사주명리학을 결정론이라고 해서 비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뉴턴역학이 결정론적이어서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출생에도 초기 조건은 대단히 중요하다. DNA에 결함이 있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게 된다면 치명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어느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는가라는 초기 조건은 한 사람의 일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사주명리학은 과학이 아니다. 한 사람이 태어난 때를 여덟 글자로 분류하는 것은 임의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글자에 사람의 기질이나 운을 대응시키는 과정에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로 구성된 육십갑자에 따르면 60년을 주기로 똑같은 세상의 기운이 돌아오는 셈인데 그 또한 별 근거가 없다.

게다가 사주팔자로 정해지는 운세의 경우의 수가 많아야 수십만 내지 수백만 가지에 불과해 한국의 인구만 놓고 보더라도 수많은 사람이 똑같은 사주를 타고난다. 그들이 모두 같은 운명을 살아가고 있을까? 아닐 것이다.

초기 조건에 따라 모든 것이 정해지는 결정론적인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20세기에 만들어진 21세기 영화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은 <매트릭스> 1편을 보면 주인공 네오가 처음으로 모피어스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운명을 믿느냐고 묻자 네오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 이유를 묻는 모피어스에게 네오는 자신의 인생이 무언가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생각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같은 네오의 답변은 통제받지 않는 자유의지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임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딜레마가 생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오와 마찬가지로 통제받지 않는 자유의지로 영위하는 삶을 선택하겠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이나 운명이 애초에 어떤 거대한 초자연적인 힘에 따라 큰 틀에서 정해져 있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자신의 운세를 알고 싶어 한다. 초자연적인 힘으로 정해진 운명의 틀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돌파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굳이 돈을 써서 철학관을 찾아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반대로 그 초자연적인 운명이 너무나 강해 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피할 수 없다면 미리 ‘내 인생의 스포일러’를 듣는 것이 현실을 즐겁게 살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리학에서 결정론적 세계관이 무너진 것은 20세기 초반 양자역학의 등장과 함께였다. 양자역학은 원자 이하의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원리로서 인간사 같은 거시세계에서는 그 성질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가장 정통적인 틀인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어떤 물리계의 최종적인 상태를 오직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다. 게다가 어떤 형태로든 관측하기 전에는 그 물리계가 여러 가능한 상태들이 중첩된 채로 존재한다. 이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과도 같다. 관측이 이루어지면 중첩은 사라지고 관측 결과에 상응하는 단 하나의 상태만 남는다. 여기서 어떤 상태가 남게 될지는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다가 특수한 헤드폰을 썼더니 특정 악기 하나의 소리만 들리는 것과도 같다. 다만 어떤 악기의 소리가 들릴 것인지는 확률적으로 결정된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결정론이 배격되므로 뉴턴역학보다는 자유의지가 들어설 여지가 많다. 천하의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음 따윈 하지 않는다”면서 확률론적인 코펜하겐 해석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고 적어도 양자역학이 불완전한 이론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유의지를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결정론적인 과학관보다는 확률론적인 세계관을 더 선호할 것은 분명하다. 반면 결정론적 세계관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란 기껏해야 환상 내지는 착각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은 한때 달에 빗대어, 만약 달이 의식을 갖고 있다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항상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라 했다. 결정론적인 입장에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자유의지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과연 나는 올해 지인의 예측대로 돈을 많이 벌게 될까? 인생 반백년을 살아보니 큰돈을 버는 것도 좋겠지만 큰돈을 써야 하는 불행한 일을 겪지 않는 것이 인생에서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점점 더 많이 들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재작년 내가 급성통증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뒤 2주간 입원하고 수술까지 받았던 개인적인 경험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큰 불행만 막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쉽게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계속 도전의 횟수를 늘릴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게 될 가능성도 커진다. 돈 많은 부자가 결국에는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큰 행운을 불러오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쉽지 않겠지만 큰 불행을 막는 것은 상당 부분 우리 모두의 ‘자유의지’(비록 그것이 집단적인 환상이라 할지라도)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불행에 대비한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병원에 2주간 누워 있으면서 수술까지 했지만 큰돈을 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의료보험체계 덕분이었다. 의료민영화가 도입·확대된다면 병원비 청구서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당장 가까운 미래에 이른바 ‘문재인케어’가 축소된다고 하니 지금 그 혜택을 받고 있는 나로서는 현실적인 걱정이 앞선다.

의료보험 보장을 높이면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에 걸리더라도 집안 기둥을 뽑지 않아도 된다. 노동현장에서 비용 절감보다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시한다면 노동자의 생명뿐만 아니라 그 노동의 결과물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도 지킬 수 있다. 화물노동자가 인간답게 노동할 권리를 보장하면 도로 위를 달리는 모든 사람들의 안전도 그만큼 높아진다. 한여름에 물가에 가지 말라거나 10월에 사람 많은 곳을 피하라고 조언하기보다 위험이 예상되는 곳에 안전조치를 더 강화하는 것이 훨씬 더 확실한 방법 아닌가? 왜냐하면 후자는 전자의 조언을 듣지 않은 수많은 사람의 생명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좋은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아직 알 수 없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기대보려 한다면 이런 모든 노력들을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다 기울인 뒤에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에서 주민센터 직원에 이르기까지 공무원들은 바로 그런 노력을 기울이라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종필 교수

[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타고난 팔자? 주사위 놀음? ‘인생 스포일러’ 그냥 따를까, 돌파할까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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