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의사다. 대통령의 칼끝이 이제 의사들을 향하고 있다. 사교육, R&D에 이어 의사까지. 자칭 ‘반카르텔 정부’의 칼바람은 거침이 없다. 현 정부의 장기인 압수수색과 출국금지, 행정처분, 고발 등 법적 조치들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의사 증원 발표와 전공의들의 잇단 사직으로 촉발된 의료대란 3주째. 사태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전공의에 이어 전임의들의 잇단 재계약 포기, 의대 교수들의 사직 움직임 등으로 진짜 의료대란은 지금부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달 6일, 갑자기 튀어나온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방안 발표가 현 사태의 도화선이 됐다. 의료계와 정부의 강 대 강 대치 속에 치료와 수술 지연에 따른 유산, 사망 등 극단적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보건위기나 전쟁 상황도 아닌데,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난데없는 의료대란에 시민들은 황당할 뿐이다. 꼭 이 시점에, 이런 방식의 속도전에 나서야 하나? 정부·여당 입장에서는 꼭 이래야만 했던 것 같다.
의사 증원 방안이 지난해 10월11일 강서구청장 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이후 국면전환용의 하나로 검토됐다는 것은 여당에서도 부인하지 않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지난해 초부터 의료계와 협의하던 보건복지부가 여름까지 언급했던 증원 의사 수는 500명 선이었다. 갑자기 10월 중순부터 증원 수준이 대폭 늘 것이라는 전망, 대통령이 이 사안에 관심을 갖고 있고, 대통령이 직접 발표할 것이라는 보도가 이어졌다. 증원 규모 발표를 미루던 정부는 설 연휴 직전 올 입시부터 2000명을 증원하겠다는 깜짝 발표를 했다. 그동안 각계 예측 최대치 1000명을 한참 뛰어넘는 메가톤급 규모였다. 복지부 발표 이후 정부·여당을 둘러싼 모든 논란, 잡음은 일거에 사라졌다.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훌쩍 뛰고, 의사 증원 문제가 모든 사안을 빨아들이며 골치 아픈 경제, 민생 이슈 모두가 증발했으니 선거 국면에서 이만한 효자가 없다.
물론 의사들도 정부의 일방적·독단적 정책 추진에도 왜 시민들의 시선이 냉랭한지, 그동안 대정부 투쟁 무패 기록을 이어가는 동안, 의사 집단을 넘어 공동체 전체를 위한 고민과 합리적 대안을 스스로 얼마나 모색하고 목소리를 냈는지 이 기회에 돌아봐야 한다.
19년 동안 묶여 있던 의사 정원을, 단번에 현 정원의 65% 수준까지 폭발적으로 늘리는 방안을 발표하면서도, 정부는 상식적인 질문과 우려에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 왜 지금, 일거에 진행해야 하나, 2000명이라는 숫자의 근거는 뭔가, 의대 정원을 증원하면 ‘지역·필수의료 파행’이라는 현재의 고질적 의료 문제는 풀리는가. 정부는 2000명 증원의 근거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KDI), 서울대 등 3곳의 연구 조사를 제시했으나,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자가 공개 반발하는가 하면, 연구 내용 일부를 정반대의 결론에 갖다 붙이며 견강부회식으로 이용했다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더욱이 의대 증원 규모 발표 직후 방송 인터뷰에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박민수 복지부 2차관)던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의사들의 진료공백 상당 부분을 간호사들에게 떠넘기는 등 위험한 방안이다. 여당 고위 당직자(유의동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의 발언도 귀를 의심케 한다. 최근 라디오 방송에 나와 의료교육 부실과 필수·지역의료 기피 문제 해결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일단은 뽑아놓고서 논의한다”며 “일종의 개문발차 형식”이라고 하니, 이런 무책임이 없다.
갑작스러운 의대 증원이 의대 쏠림 가속화와 교육 전반의 파행으로, 망국의 길의 전조로 이어지지나 않을지도 불안하다. 이미 서울 대치동 학원가는 의대반 수강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이 카르텔로 지목한 강남의 사교육 기관이 의대 증원의 최대 수혜를 누리고, 임기 초 대통령이 ‘반도체 인재론’을 외치며 관련 학과와 정원을 확대했지만 최상위권 대학 합격생들마저 줄줄이 의대로 빠져나가고 있으니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R&D 예산 삭감 후폭풍으로 이공계의 연구 분위기가 잔뜩 위축된 상황에서, 현 정부 정책은 현재의 국민 안전은 물론 미래 국가 청사진마저 흔들고 있다.
국민, 민생을 말하는 정부·여당은 과연 꽉 막힌 현 사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있는가. 성경 속 ‘솔로몬의 재판’이 떠오른다. 한 발짝 물러선 소통과 균형의 길 대신, 아이를 자르려는 ‘두 가짜 엄마들’에 시민들은 절망하고 있다. 정부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국민 생명의 최종 책임자는 정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