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너머 사람을 보라

오창민 논설위원

통계청의 ‘2023년 연간 산업활동 동향’을 보면 지난해 소매판매액지수는 전년 대비 1.4% 감소했다. 내구재(0.2%)는 소폭 늘었지만 음식료품 등 비내구재(-1.8%)나 의복 같은 준내구재(-2.6%) 판매는 급감했다. 지난해 개인회생을 신청한 자영업자는 전년도에 비해 3배 가까이 늘었다. 개인사업자의 저축은행 대출 연체율은 2022년 4분기 3.31%에서 지난해 3분기 7.49%로 올랐다.

정부와 금융당국이 발표하는 숫자는 추상적이다. 그 자체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숫자 이면에 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봐야 한다. 통상 소매판매액은 매년 증가한다. 이것이 전년도보다 감소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자영업자들이 대거 시쳇말로 ‘폭망’했다는 의미다.

필자가 사는 서울 서대문구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는 식육점이 얼마 전 폐업했다. 식육점 맞은편에 있는 무한리필 고깃집도 불이 꺼졌다. 코로나19 사태 전엔 와이셔츠 등 남성 의류를 팔던 가게였다. 그 뒤로 횟집, 장어구이집 등으로 탈바꿈했는데 고깃집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은 것이다. 5년 전 이 동네로 이사올 때 맨 먼저 들렀던 공인중개사 사무소도 지난해 가을 간판을 내렸다. 주상복합건물의 1층 목 좋은 장소인데 지금껏 비어 있다. 아파트 입구 업소 30여곳 중 3곳의 상태가 이렇다.

중소기업 퇴직 뒤 2년가량 쉬다가 코로나19가 잠잠해지자 재작년 경기도 신도시 지역에 보리밥 식당을 연 지인이 있다. 처음엔 직원을 3명 고용했지만 매출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 6개월 만에 모두 내보냈다. 부부가 어렵게 꾸려나가다가 지난해 가을 폐업을 결정했지만 임차인을 못 구해 보증금만 축내고 있다. 인테리어 시공비 등 초기 투자비와 인건비, 월세로 지금까지 2억원 가까이 까먹었다. 대출 상환일은 다가오는데 갚을 방법이 없다. 부인이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는 오는 6월쯤 대출 연체자가 될 것이다.

내수 부진으로 자영업자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정부 지출은 되레 줄었다. 지난해 예산 불용액이 역대 최대인 45조7000억원(불용률 8.5%)을 기록했다. 부자 감세 등으로 발생한 56조4000억원의 세수 결손을 막기 위해 정부가 써야 할 사업에 당초 계획대로 돈을 쓰지 않은 것이다. 돈이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답은 명확한데 순서가 바뀌었다. 경기 둔화 국면에 정부 지출이 주니 내수가 더욱 위축되고 경제에도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

500만 자영업자와 100만 무급가족봉사자는 한국 중산층의 핵심이다. 자영업자 가장에게 딸린 식솔을 고려하면 1000만명이 넘는다. 지금 같은 불황 국면이 조금만 더 길어지면 자영업자의 상당수는 가난에서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하류층으로 전락할 것이다. 근면하고 성실한 자영업자는 일단 살려놓고 봐야 한다.

정부도 최근 자영업자 지원 대책을 내놨다. 금융권의 도움을 받아 자영업자 200만여명에게 1인당 100만원씩, 총 2조4000억원의 이자를 환급하기로 했다. 간이과세자 기준을 연 매출 8000만원에서 1억400만원으로 올려 세금 부담을 줄여주기로 했다. 대통령이 검사 출신 아니라고 할까봐 신분을 속인 미성년자에게 술·담배를 판매했다가 적발된 자영업자는 면책한다는 지침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4·10 총선을 앞두고 급조한 것이라 실효성도 의심스럽다. 진정으로 자영업자를 도울 요량이라면 예산 불용이 없어야 했다. 재정 적자 확대가 우려되고 미래세대에 부담을 넘기는 게 걱정된다면 지금이라도 감세 정책을 철회해야 한다.

지난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미국이나 일본보다 낮은 1%대이고, 올해도 잘해야 2%대 초반이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다. 2021년과 2022년 경제성장률은 각각 4.3%와 2.6%였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성장률이 1%포인트 떨어지면 취업자가 45만1000명 줄고 가계의 월평균 소득이 10만원 감소한다.

“당신은 실직의 공포와 도산을 걱정해본 적 있는가. 직원들 월급 줄 걱정을 경험해본 적 있는가.” 김동연 경기지사가 과거 경제부총리에 취임하면서 기획재정부 공무원들에게 한 말이다. 한 명 한 명의 인생이 걸린 문제를 책상에서 관성적으로 처리하지 말라는 얘기다. 윤석열 정부에 당부한다. 숫자 너머 사람을 보라. 경제지표에 사람을 끼워 맞추지 말라.

오창민 논설위원

오창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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