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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취미, 과학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이 떠오를까. 세련된 몸가짐과 적절한 외국어 실력, 다양한 문화지식, 그리고 국제정치에 대한 해석과 진단, 동서양 고전에 대한 해박한 이해, 클래식 음악의 유명 피아니스트별, 지휘자별 특성과 구별법 등등? 이런 교양인과 시간을 보내면 주워듣고 배울 것이 많아 재미있다. 세상이 교양인으로 가득 차면 평화가 넘쳐날 것 같은데 실상을 별로 그렇지 못하다. 점잖은 교양인들이 음풍을 논하는 음악 사이트, 각종 마니아 사이트, 스포츠 토론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살벌하다. 심한 경우 옆에 곡괭이라도 있으면 들고나와 때릴 기세이다. ‘세계 10대 피아니스트’에 누가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엄청난 독설과 조롱으로 다툰다. 이런 싸움은 마징가와 태권브이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를 따지는 정도의 어이없는 열정이다. 지식의 과시, 상대적 우월함을 위한 교양에는 항상 이런 위험이 상존한다. 그래서 필자는 세상 평화의 관점으로 교양의 기준을 조금 다르게, 솔직히 말하... -
과학의 아나키즘
지난주 학교 앞에 다리 하나가 열렸다. 카이스트 정문에서 대전 시내에 곧바로 이어지는 다리로 융합의 다리, 과학의 다리 등 우여곡절 작명 과정 끝에 ‘카이스트교’로 개통됐다. 다리 중간에 과학자 기념 공간이 있는데 한 편에는 세계적인 과학자 넷, 다른 편에는 한국 과학자 셋의 흉상이 놓였다. 일부러 한국 과학자 흉상 자리를 하나 남겨 놓았는데 미래의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를 위해서란다. 포스텍에도 학생들이 많이 드나드는 무은재기념관 앞 광장에 아인슈타인, 에디슨, 뉴턴 등 과학자 흉상 옆에 미래의 한국 과학자를 위한 좌대가 놓여 있다.이처럼 세계적인 과학자 반열에 드는 한국인 과학자 탄생에 대한 염원은, 입시교육 체제에서 무지막지하게 재미없이 가르치는 중·고등학교 수학·과학 수업, 실험실 연구보다 연구과제 관리와 정산으로 날밤을 새우는 연구 현장, 과학연구 지원을 빙자해 부실한 연구사업 기획을 눈감아주는 부처 관행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만약 정말로 한국인이 노벨상을 받... -
엔트로피와 햄버거
엔트로피라는 물리학 용어가 있다. 다른 전문 용어와 달리 엔트로피는 여기저기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개념이기에 비교적 익숙하다. 엔트로피는 흔히 무질서의 정도를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질서가 없고 혼란스러울수록 엔트로피가 높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릇에 콩과 팥을 잘 섞어 놓은 상태가 콩과 팥을 깔끔하게 분리해 놓은 상태보다 엔트로피가 높다.하지만 엔트로피를 무질서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대강만 맞다. 그 이유는 물리학의 ‘질서’ 개념이 일상적 질서 개념과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와 관련된 무질서의 정도는 특정 ‘거시상태에 대응되는 미시상태의 개수’로 정의된다. 이때 거시상태란 큰 틀에서 볼 때 같은 결과로 파악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이에 대응되는 미시상태의 개수란 그 거시상태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상태의 개수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감탄스러울 정도로 잘 정리된 방이 방금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어질러진 방보다 엔트로피가 높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
성찰이 필요한 ‘생명공학의 질주’
“무엇을 상상해도 현실에서 이룰 수 있다. 아니 그 이상이다.”10년 전부터 세계 생명공학계에서 줄곧 들려온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생명공학 기법이 개발되고, 이를 적용한 실험결과가 쏟아져 나온다. 생명체의 유전자를 변형하는 작업이 그 중심에 있다. 변형의 대상에 농산물과 가축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작은 2000년대 중반 미국에서 출범한 합성생물학 분야였다. 말 그대로 생명체를 합성하겠다는, 일반인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목표를 내세운 공학자들이 등장했다. 생명체의 기본 특성만을 갖추고 작동하는 무언가를 합성하려고 했다. 먹고 살 수 있는 대사 능력, 자손을 낳는 생식 능력, 그리고 변화되는 환경에 버티는 적응 능력 등을 갖춘 생명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략 살아 움직이기만 한다면 여기에 인간이 원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갖가지 유전자를 넣으려는 의도였다. 가령 지구 온난화의 원인인 이산화탄소를 분해하는 동시에 차세대 에너지원인 수소를 합성하는 ‘미생물 공장’... -
몇 명이 모였나 세어보자
한 주제로 모인 군중의 수는 사안의 시급성이나 지지 세력의 위력을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렇기 때문에 각 진영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군중 수는 다르게 보이게 된다. 조금이라도 더 많았으면 하는 쪽과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쪽에서 내놓는 집계는 이 때문에 항상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일정 공간에 머물고 있는 사람의 수를 정확하게 계산해야 하는 이유에는 정치적 진영논리가 아닌 현실적인 요구도 있다.저개발 국가의 낙후된 지역에 치명적인 전염병이 번지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출생·사망 신고조차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인지 정확히 알아내는 일은 사용할 백신의 양과 의료진 수, 나중에 주민을 따로 옮겨 거주하게 할 임시 숙소의 개수를 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초 작업이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샘플로 선택된 특정 지역을 수작업으로 꼼꼼하게 조사한 뒤, 다른 미조사 지역의 밀도를 샘플의 밀도와 같다고 가정하여 추정하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상황이 심각하여... -
시인을 위한 물리학
캠벨 수프 캔을 나란히 늘어놓은 그림으로 유명한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스스로를 ‘심오하게 피상적인’(deeply superficial)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그가 죽기 일년 전 제작한 자화상에 딸려 있는 표현이다. 이 자화상은 워홀 사진 네 장을 실크스크린으로 겹쳐 인쇄해 평면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3D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해석에 따라 ‘deeply’는 그냥 ‘매우’처럼 다음에 오는 형용사를 단순히 강조하는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깊이와 표면을 각각 다른 품사로 표현하여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나는 이 표현이 이공계중심대학에서 인문사회 교양교육이 갖는 딜레마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올해 시작된 ‘제3차 과학기술인재 육성·지원 기본계획(2016~2020)’은 세부 추진과제 중 하나로 과학기술계 학생의 기초소양 교육 강화를 제시하고 있다. 학교의 영문명칭이 ST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 ‘스트(ST)대학’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이공계중심대학의 공식 명칭은 과학기술... -
빅데이터, 만능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선거 승리는 많은 사람에게 충격으로 여겨졌다. 각종 예측 결과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했던 힐러리 클린턴이 그토록 많은 표 차이로 패배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대통령 선거 제도의 기묘한 특징 때문에 클린턴이 실제 득표수에서는 앞서고도 선거인단 수에서 뒤진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근소한 차이도 아니고 완패를 당했다는 사실은 이변이었다.당연히 선거 이후 왜 선거 예측이 틀렸는지를 놓고 여러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통상적인 확률 해석에 따르자면 클린턴이 높은 확률로 트럼프를 이길 것이라는 예측과 트럼프가 클린턴을 이긴 실제 선거 결과는 모순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동전을 던져 앞면이 연속해서 5번 나올 확률은 3% 정도밖에 안된다. 그런데 동전의 앞면이 5번 연속 나오는 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이렇게 확률 낮은 사건이 일어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할 수는 없다.... -
앤젤리나 졸리의 유전자 검사
2013년 5월 세계적인 여배우 앤젤리나 졸리가 유방암 절제수술을 받은 이야기가 새삼 국내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당시 졸리는 브라카(BRCA1) 유전자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예방 차원에서 유방을 절제했다. 브라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80세에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7%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졸리의 모친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졸리는 자신의 경험을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렸고, 유전자 검사 결과만으로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일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졸리는 2015년 3월 한 차례 더 수술을 받았다. 이번에는 난소 제거 수술이었다. 돌연변이 브라카 유전자를 보유한 여성은 80세에 난소암에 걸릴 확률이 50%이다. 당시 세간의 논란은 좀 더 심각하게 벌어졌다. 일단 50%라는 확률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였다. 87%는 상식적으로 봐도 높은 수치다. 하지만 병에 걸릴 확률이 절반이라면 느낌이 다르다. 30%라면 어떨까. 더욱이 ... -
컴퓨터 버리는 방법
한 해 동안 버려지는 PC, 노트북이 100만대가 넘는다. 그런데 컴퓨터는 냉장고와 달라서 반드시 이전 흔적을 지우고 그것을 확인한 뒤에 버려야 한다. 외국 경우지만 중고시장에서 구한 PC의 하드에서 수만건의 환자 정보가 복원된 사례에서 보듯 무심코 버린 컴퓨터는 해커의 좋은 먹잇감이다.컴퓨터에서 파일을 없애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버린 파일을 담아둔 휴지통을 비우는 작업도 파일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파일 메타정보에 ‘삭제됨’이라는 표시(tagging)를 하는 것이다. 메타정보 태그는 강시 이마에 붙이는 부적과 같다. 부적만 떼면 강시는 언제든지 다시 살아난다. 도서관 목록에서 특정 도서카드를 빼버리면 사람들이 그 책을 찾을 수 없는 원리와 같다. 그러나 그 책 자체는 도서관에 남아있어 기를 쓰고 도서관을 뒤지면 결국은 찾아진다. 그래서 복원이 불가능하게 하드의 정보를 지우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소프트웨어적인 방법으로는 보안기능이 있는 소거전용 프로... -
새로움은 가치가 아니다
첫애가 첫애일 수 있는 것은 둘째, 셋째처럼 다른 애들이 있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첫애는 외둥이가 되어버린다. 처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다음이 있어야 하는 게 사는 이치임에도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대한 평가에서는 종종 이를 망각하는 제도가 설계되고 존속된다. 대표적인 것이 유사·중복연구 방지제도이다. 정부는 국가연구개발과제 수행 시 ‘국가연구개발사업관리 등에 관한 규정’ 제7조에 따라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시스템(NTIS)을 통한 과제 유사성 검토를 의무화하고 있다.NTIS 구축사업 경제성 분석에 관한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유사·중복 과제 방지를 통해 2005~2012년까지 총 630억원을 투입해 약 5409억원 이상의 예산절감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2013년 감사원에서 2008년부터 5년간 국가 연구개발 사업을 추진단계별로 분석해 발표한 ‘국가 R&D 감사백서’에서는 기획단계에서 연구개발사업의 유사·중복성 차단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검토하고 있다. 이 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