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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괴’와 저항권
느닷없던 비상계엄은 곧바로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과 신속하게 국회로 모인 의원들 덕에 곧바로 해제되었다. 뉴스 시청과 집회의 피로에 시달리며 기다리던 탄핵소추안도 어렵사리 가결되었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마음이 좀 편해져야 하는데, 헌법재판소로 넘어간 공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어 조마조마하다. 심지어 윤석열과 그 일당은 끝까지 싸우겠다고 선언했고 지금도 정부는 위태로워 보인다.법을 앞세운 괴물들이번 내란은 법을 무시하지 않고 법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이전과 다르다. 윤석열은 일단 반대파를 체포해서 조사하다보면 뭐라도 나올 거라는, 법은 해석의 여지가 있으니 나중에 절차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면 된다는 검사 시절의 습관을 따랐을 것이다. 외부의 적극적인 저항과 내부의 소극적인 태업이 없었다면 그들의 시도는 성공하고 내란은 합법화되었을 것이다.지금도 윤석열을 옹호하는 세력들은 계엄이 법에 보장된 대통령의 권한이니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에 따른 어떤 해석이 ... -
사회통념과 알권리
지난 10월29일 정부는 부당하거나 사회통념상 과도한 정보공개청구를 받지 않을 기준을 마련해 담당자의 업무부담을 줄이고 행정력 낭비를 막겠다는 정보공개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그러자 시민단체들은 이번 개정안이 시민의 알권리를 침해하는 악법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시민단체가 정부의 피로도를 무시하고 억지 주장을 펼치는 걸까?세월호 유가족인 박종대씨는 국회와 대한변협, 언론, 시민단체 등의 도움을 받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4·16 세월호 사건 기록연구>라는 10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썼다. 정부가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과 달리 자신의 역할을 포기했기에 유가족이 직접 나서서 세월호가 왜, 어떻게 침몰했고, 왜 구조하지 않았고 진상규명을 방해했는가에 관한 답을 찾으려 했다. 이 과정에서 박종대씨는 정부를 상대로 340여건에 이르는 정보공개를 청구해 “매우 유의미한 자료”를 수집했다.2022년 10월29... -
정부가 허락하는 시민활동?
11월이 다가오며 시민단체들의 후원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회원으로 회비를 내는 단체도 있고, 외부활동을 하면서 만난 단체들의 초대도 있다. 매년 이맘때면 단체들은 한 해 적자를 메우기 위해 또는 내년 사업을 위해 후원금을 모으는 행사를 연다. 기후위기와 불평등, 평화처럼 다뤄야 할 사안들은 계속 늘어나는데 후원금은 줄고 정부 지원금도 축소되어 단체들의 형편이 나빠지고 있다.위축되는 시민단체의 활동1990년대 초반만 해도 시민단체들은 비정부기구(NGO)의 붐을 타고 입법, 행정, 사법 3부의 뒤를 잇는 ‘제4부’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보다 시민단체의 수는 적었지만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 여론에 힘입어 시민단체는 정치와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장점만큼 단점도 있었지만 시민단체들의 활동은 복지를 강화하고 시민 참여를 활성화하는 여러 제도들을 도입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다만 그 성공을 책임질 정치세력이 없다보니 올바른 정착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흐... -
‘식품사막’은 올바른 표현일까
몇달 전부터 언론에서 ‘식품사막(food desert)’이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 말은 가게가 문을 닫아 생선이나 두부, 계란 같은 신선식품을 구하기 어려운 한국 농어촌의 현실을 묘사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통계청의 농림어업총조사에 따르면, 2020년을 기준으로 전국의 행정리 중 73.5%에 식품 소매점이 없다. 시장이 멀고 교통도 불편해 농촌의 밥상이 척박해지고, 관광지가 아닌 시골 마을에는 식당조차 없어 집밖에서 끼니를 때우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그래서인지 지난 7월 말 농림축산식품부는 식품사막의 해결책으로 생활필수품과 농산물을 실은 개조트럭을 농협과 함께 운영한다는 ‘가가호호 농촌 이동장터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농촌이라는 사막에 이동식 오아시스를 만들어주겠다는 자비로운 발상이다.사막이 은폐하는 불평등그런데 왜 식품사막이란 말이 불편하게만 느껴질까? ‘지방소멸’이란 말이 청년이 줄어드는 지역 현실을 묘사하며 대안을 찾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 -
누구를 위하여 경보는 울리나
지난 목요일 몇년 만에 서울 광화문에 들렀다. 민방위훈련이 시작될 쯤에 도착해서 지하철 안에서부터 공습경보방송이 들렸다. 방송의 목소리는 사뭇 심각했지만 그걸 듣는 시민들의 표정은 무심했고, 사람들 이동을 통제하던 이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20분간의 훈련이 끝난 뒤 시민과 공무원 모두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지상으로 나가 둘러본 광화문의 모습도 비슷했다. 서명을 받고 기자회견을 열던 이순신 장군 동상 근처는 분수대로 바뀌었고, 그 공간은 광장이란 의미를 잃어버린 듯했다. 역사는 지워지고 사이렌 소리가 귀에 남으니 마음이 심란해졌다.공안정국과 정계개편취임 이후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공산주의, 좌파, 반자유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지난 8월19일 을지 및 제36회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고 북한이 개전 초기부터 이들을 동원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
무엇이 악성민원을 만드나
얼마 전 많은 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인명피해가 났다. 한 남성이 집 주변을 살피러 나갔다가 옹벽이 무너지며 쏟아지는 토사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그 사고가 난 날에도, 그 이튿날에도 행정안전부, 산림청, 한국수자원공사, 충북도청, 군청 등에서 수십건의 문자가 새벽에 쏟아졌지만 쓸모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천변, 급경사지, 산과 인접한 주택 등은 위험하니 접근하지 말고 대피하라는데, 한밤중이나 새벽에 문자를 받고 어디로, 어떻게, 그리고 얼마 동안이나 대피하라는 걸까? 비슷하게 반복되는 메시지를 받고 알아서 대응할 시민들은 몇이나 될까?행정과 기업, 시민이 함께 쌓는 신뢰우리집도 산 밑에 있어 집 뒤에 옹벽이 있고 다른 집들도 비슷한 처지다. 산사태 위험이 높다는 문자가 오면 겁이 덜컥 나는데, 군청에 전화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지금 전 인원이 사고현장에 나가 수습 중이라 여력이 없다, 산림청이나 다른 곳에 물어보시라, 사고가... -
왜 행정개혁은 얘기되지 않을까
지난달 전동킥보드를 함께 타던 청소년 두 명이 차량과 충돌해 한 명이 목숨을 잃고 한 명이 다쳤다. 늦은 시간 친구와 킥보드를 타고 이동하다 벌어진 불행한 사고였다. 사고가 나자 군청과 학교는 뒤늦게 안전 캠페인을 벌이고 경찰은 단속을 강화했지만 청소년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 차가운 반응에는 이유가 있다.규정이 없어 발생한 사고일까?몇년 전부터 차도와 인도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방치되던 전동킥보드는 마땅한 교통수단을 찾지 못한 청소년들의 관심을 끌었다. 법에 따르면 면허를 가진 사람만이 탈 수 있고 2인 이상 동승할 수 없지만, 관리하는 주체가 없으니 청소년들이 많이 이용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때론 위태롭게 운전했지만 청소년들은 스스로 대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작년에 지역청소년들이 군청에 정책을 제안하는 자리에 강사 및 조언자로 참여했다. 그때 청소년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전동킥보드의 이용과 관련된 교육과 관리, 그것을 대체할 교통수단이었다.... -
에너지 민주주의의 방정식을 새로 짜자
내가 살고 있는 충청북도 옥천군에는 모두 350개가량의 송전탑이 있고 1975년에 만든 변전소도 하나 있다. 변전소가 있는 면에는 송전탑 149개가 집중되어서 주민들의 불만이 많다. 정부와 한국전력은 송전탑이 안전하다고 주장하지만 선거 때마다 송전탑 이전 이야기가 나온다. 전자파가 인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설명과 환자가 늘어나는 불안한 현실 사이에는 타협점이 없기 때문이다.성장에 짓밟힌 에너지 민주주의전국에 세워진 크고 작은 송전탑이 이미 4만개. 그럼에도 송전량이 많고 손실이 적다는 이유로 765㎸ 초고압송전탑은 늘어나고 있다. 경제성장을 위해 여전히 많은 전력이 필요하고, 발전소가 새로 생기는 만큼 주요한 소비처로 전기를 보내는 송전탑의 수와 규모도 늘어난다.예를 들어 정부는 경기 용인시에 세계 최대 규모의 시스템반도체 산업단지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많은 양의 물과 전기가 필요한데, 이미 전체 전력량의 4분의 1을 ... -
부실정부 대한민국
2023년 7월15일 오전, 연일 내린 폭우로 하천이 범람하고 제방이 무너져 지하차도가 물에 잠겼고, 버스 승객을 포함해 14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송지하차도 참사는 갑자기 쏟아진 비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며칠 동안 많은 비가 내리고 홍수경보가 이미 발령된 상황에서 발생했다. 올여름에도 많은 비가 내릴 거라 예고되는데, 정부는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제대로 대책을 세우고 있을까?지난 4월24일 오송참사 시민진상조사위원회는 넉 달 동안의 조사를 거쳐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선 가장 먼저 정부 조사의 한계가 지적됐다. 기본적으로 정부 조사는 당시 제방이 붕괴된 현상에만 집중하고 담당자의 행적과 조치, 감시·감독 권한만을 따진다. 그래서 기관의 책임은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정도로 축소되고 관련자들의 위법행위를 따져 법적인 책임을 묻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진다. 그러나 이런 결론으로는 대책이 마련되기 어렵다.시민진상조사위원회는 정부 조사의 ... -
지하로 가는 정치와 슬픔의 공화국
10일 제22대 총선의 결과가 나온다. 선거 이후의 풍경은 어떨까? 사람들이 기대하는 한 편의 복수극이 시작될까? 서로를 심판하겠다던 거대 양당은 어떤 공방을 이어갈까? 관전 지점은 많겠지만 내 관심은 복수와 심판보다 이번 선거에서 그들이 내건 비슷한 공약의 흐름이다. 대표적인 것이 경부선을 비롯한 전국의 철도와 고속(간선)도로를 지하화하겠다는 공약이다.여야가 한통속인 지하화 계획국민의힘은 경부선 철도와 경인전철, 주요 고속(간선)도로를 지하화해서 지상 공간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겠다는 공약을 ‘교통·인프라 격차 해소’의 첫 번째 정책으로 제안했다. 2025년까지 주요 도시의 도심을 지나는 철도와 도로를 지하화하되 지하화 비용을 지상의 개발수익으로 충당하겠다는 구상이다. 더불어민주당도 철도와 GTX, 도시철도의 도심 구간, 서울의 내부순환로 등을 예외 없이 지하화한다는 공약을 ‘민생을 촘촘히 챙기겠습니다’의 32번째 공약으로 제안했다. 관련 공약의 내용은 국민의힘의 그것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