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과 메가도시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나는 인구 300만명의 도시에서 태어나 1000만명의 도시에서 공부했고 100만명의 도시에서 아이를 기르며 일하다 5만명의 농촌으로 이주했다.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첫날 우리 집 어린이는 “이제 뛰어도 돼? 소리 질러도 돼?” 물으며 집 안을 달렸다. 그때 떠나지 않고 전세 살던 아파트를 샀으면 벌써 몇억원을 벌었을 거라 타박하는 이들도 있다. 지금은 팔아도 서울 전셋집조차 구하기 어려울 가격의 집에 살지만 재테크가 이주의 이유는 아니었으니 그 말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산은 줄었지만 이주한 뒤 우리 가족의 시공간은 넓어졌고, 적당히 한산한 거리의 여유 있는 속도가 표준이 되었다. 고개를 들면 아파트가 아니라 낮은 산이 이어지고, 가끔 집 앞에서 고라니와 뱀을 만나기도 한다. 한층 느려지고 넓어진 시공간은 감정과 생각에 여유를 줬다.

뛰어다니던 네 살 어린이는 이제 중학생 청소년이 되었고 이곳을 고향으로 여긴다. 아직은 도시를 동경하지 않고 친구들과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이곳을 좋아한다. 관계의 밀도가 촘촘해서 큰 걱정 없이 집 밖을 다닐 수 있고, 사교육비를 쓰지 않아도 유별나게 보이지 않는 곳이라 스트레스도 적다. 작은영화관도 생겨서 7000원이면 개봉작을 볼 수 있고, 읍내 마트나 오일장에서 필요한 물건을 산다. 대도시의 과잉에 비하면 부족해 보이지만 제법 넉넉한 삶이다.

당연히 불편한 점도 있다. 읍내에 병원과 약국은 여럿이지만 피부과나 부인과는 없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문을 닫는 가게들이 늘어났고, 줄어드는 대중교통은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동네에서 힘 좀 쓴다는 사람들의 행세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지방행정의 무능력과 무기력은 기대를 접게 만든다. 그렇지만 대도시로 돌아갈 마음은 아직 생기지 않는다.

메가도시에 묻힐 삶의 주제들

이곳 생활을 좋아한다 해서 서울생활에 지친 지인들에게 비수도권으로 내려오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거기서 생활할 비용이면 여기서 조금 다르게 살 수 있다고 보지만 다들 나름의 사정과 선택이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주에 대한 상담은 환영하지만 모두가 이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특정한 지역을 이상으로 만드는 사회보다 살고 싶은 곳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곳을 인구소멸 위험지역이라 정해놓고, 경쟁력을 위해 서울시나 대도시를 더 키우겠다는 발상은 상식을 위협한다. 이미 그런 발언들이 더욱더 커지고 싶은 도시들의 욕망에 불을 붙이고 있다. 그러면 내년 총선에서 다뤄져야 할 기후위기, 약자의 이동권, 기본적인 사회인프라의 강화 같은 주제들은 거창한 메가도시에 밀려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메가도시가 되면 면에도 어린이집이 운영되고 병원과 약국도 들어서고 중국집과 김밥집도 생길까? 메가도시가 되면 이(里)에도 버스가 다니고 무궁화호도 늘어나고 작은 학교들도 유지될까? 선택과 집중의 순위에 들지 못해 늘 포기해야만 했던 공간에도 활기가 생길까? 질문을 던지지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메가도시의 방향은 그 반대라는 것을.

사실 농촌의 출생률이 낮다고 하지만 출생률이 가장 낮은 곳은 메가도시의 정점인 서울시이다. ‘인구 감소→지역경제 붕괴→주민 이탈→인구 감소’라는 저주의 공식이 서울시에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그곳이 살기 좋아서가 아니다. 서울시는 끊임없이 유입되는 인구와 자원을 무서운 속도로 갈아넣고 순환시켜서 유지되는 도시이다. 메가도시는 주변 인구와 자원을 빨아들이지 않고도 자신의 힘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이 모더니즘 이데올로기와 폭력

제임스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라는 책에서 때려서라도 인민을 더 좋은 삶으로 이끌겠다는 신념을 권위주의적인 ‘하이 모더니즘 이데올로기’라 불렀다. 근대의 공학자, 계획가, 고위 행정관료, 건축가, 과학자 등이 공유한 이 이데올로기는 국가가 사회를 합리적으로 설계하고 생산을 확대해 인간 욕구를 충족시키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진보를 반대하는 건 열등하고 무능력하며 시대에 뒤처진 생각으로 매도됐다.

지금 얘기되는 메가서울이든, 메가시티든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많은 정치인과 관료, 지식인이 지지하는 이 계획은 어떤 식으로든 강행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장관에 매혹되겠지만 그늘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격차를 상징하는 폭력일 뿐이다. 그 폭력을 유일한 대안인 듯 말하지 말라.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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