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984’를 닮아가는 한국 현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지난 5일 참여연대는 21대 국회가 규명해야 할 10대 과제를 발표했다. ‘대통령실의 해병대 수사 축소·외압 의혹 진상규명’, ‘관저 이전 의혹 진상규명 및 대통령실 투명성 검증’, ‘감사원·사무총장 권한 남용 진상규명’, ‘대통령 일가 서울~양평 고속도로 특혜 의혹’,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후속 조치 점검’, ‘일본 핵 오염수 투기 중단 요구 계획’, ‘캠프 데이비드 선언 검증·국회 동의 요구’, ‘누더기가 된 전세사기 지원대책 점검’, ‘LH 아파트 철근 누락 사건 책임규명·재발 방지 대책 마련’, ‘삼성물산 불법 합병으로 인한 정부와 국민연금의 손해배상 책임 추궁’ 등이다. 국회가 풀어야 할 정치의 숙제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다.

그러나 여당과 야당으로 쪼개져서 자신들이 국정을 감시하고 조사하는 헌법기관이라는 점을 망각해온 국회가 제 몫을 할 수 있을까? 168석이나 되는 의석을 가지고도 행정부에 끌려다니는 더불어민주당이 여소야대라는 판세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까? 111석의 힘으로 상임위나 본회의에서 정부를 옹호하기만 하는 국민의힘이 ‘국회’의원이라는 점을 자각할 수 있을까? 거대 정당 중심으로 움직이는 국회 구조에서 정의당을 비롯한 소수정당들이 활약할 수 있을까? 더구나 내년은 총선이 있는 해라 의원들의 마음은 국회가 아니라 지역구에 있을 것이다. 해결되지 않고 계속 쌓여만 가는 숙제들은 과연 누가 풀어야 할까?

곳곳에서 드러나는 빅브러더 징후들

국회가 무능해진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이념전쟁’으로 타협이 어려운 반정치적인 전선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동관, 유인촌처럼 구시대적일 뿐 아니라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고 비판받던 인물들을 앞세우고 있다. 윤 대통령은 동북아시아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이 시기에 하필이면 극우적인 발언을 일삼고 군사쿠데타를 정당화했던 이를 국방부 장관으로 앉히려 하고 있다. 더구나 검찰과 경찰, 군대 같은 국가의 주요 공권력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도 이루어지지 않고, 툭하면 벌어지는 압수수색은 시민사회를 겁박한다. 따져봐야 할 정책들은 다른 논란으로 덮이고 중요한 쟁점들은 은폐된다.

지금의 한국 상황을 보고 있으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생각난다. 제대로 된 논의과정도 없이 시민단체는 이권 카르텔로, 노동조합은 기득권 집단으로, 언론은 가짜뉴스로, 예술가는 선동의 전위대로 내몰려 정치적인 숙청을 당한다. 민주주의 운동가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사람으로, 전임 정부가 반국가세력으로 내몰리니 사고의 경계가 흐려진다. 안전한 핵오염수, 사과 없는 화해, 책임 없는 안전과 같은 모순된 상황들은 다른 생각을 막고 사유를 지배하려는 ‘뉴스피크(newspeak)’를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한·미·일, 북·중·러의 대립구도는 소설 속의 분할된 세계상과 닮아간다.

물론 지금의 현실이 소설 속 상황보다는 분명히 낫다. 밤중에 감쪽같이 사라지는 시민들은 없고, 시민들의 삶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사상경찰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물론 가능성은 있다). “전쟁은 평화다, 자유는 속박이다, 무지는 힘이다”라고 부르짖는 빅브러더도 보이지 않는다. 사회의 불평등이 심각하지만 아직은 완전히 계급으로 나눠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점에 안도하기에는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권력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된 사회에서는 누구라도 박해를 받는 희생양이 될 수 있고, 약자의 설 자리는 좁아진다. 정치의 파국은 그 영역의 붕괴로 끝나지 않고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헌법기관들부터 자기 몫을 해야

여야를 떠나 국회는 행정부를 감시·비판하고, 사법부는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권력을 통제해야 헌법기관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지 않다면 헌법에 대한 동의는 부정되고,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과 불안은 증오와 공포로 증폭될지 모른다.

그런 상황은 치안과 통치를 내세우는 권력에 더욱더 유리하고, 내치가 불안해질수록 권력이 의도적으로 외부와의 갈등을 선택한다는 건 정치학과 역사의 오랜 교훈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 매우 위험하고 중요한 시기를 살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 윈스턴은 저항을 선택했지만 결국엔 모진 고문을 받고 빅브러더를 받아들이며 목숨을 잃는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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