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미니스트 시어머니의 번뇌와 해방일지
모든 결혼에는 흰 장갑을 낀 제국주의가 들어있다.그렇지 않은가?-김승희 시 ‘사랑 5-결혼식의 사랑’ 중(시집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2000)페미니스트 시어머니라고 하면 모던하게 들려서 뭔가 멋있는 것 같고 자유의 향기가 풍겨올 듯해서 신선하다. 기대가 크다. 그런데 선배인 한 여성 교수님의 한탄을 들으니 거기에도 자기갈등이 큰 것 같다. 직장 일로 미국에서 사는 아들이 한 달 동안 휴가를 왔는데 며느리가 시댁에는 잠시 인사차 들를 뿐 주로 친정에서 지낸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시어머니는 대놓고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앓았다. “자기들끼리 자유롭게 살다가 잠시라도 시댁에 들어와 살려면 아무래도 며느리가 불편하겠지요. 그리고 선배도 혼자 자유롭게 지내는 게 낫지 며느리가 좁은 아파트에 들어와서 눈치보며 지내는 거 불편하잖아요. 가끔 만나 맛있는 거나 많이 해줘요”라고 위로 삼아 말했더니 선배는 서운해했다. “며느리가 친정에... -
가족은 비누 공동체다
비누를 보면 얼굴이 떠올라그 비누를 사용하던 얼굴비누 거품을 문지르면서 눈이 쓰라려 웃는 것처럼 찡그리던 얼굴가족은 비누를 같이 쓰는 비누 공동체비누칠을 할 때는 처음엔 누구나 얼굴이 웃고 있지참 오만방자, 건방지게 살기도 했는데비누 거품은 간지럽다가눈에 들어가면 쓰라려서 눈을 감게 되지비누 거품이 눈에 들어가면거만과 위엄이 다 소용 없어두 눈을 감고 쓰라리게 아픔과 양심을 생각하게 되지가족은 비누를 같이 쓰던 비누 공동체소멸의 비누어제는 비누방울을 불며 같이 웃고 놀았는데비누 거품처럼 흔적도 없이 어디로 헤어져 갔네 -김승희 신작시 <비누 공동체> 중5월은 ‘가정의달’이라는 말처럼 아무래도 5월에는 가족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아픈 곳을 자꾸 생각하듯 사람은 현재 자기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에 더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요... -
희망은 상처보다 더 크다
하필이란 말이 일생을 만들 때가 있다하필이면 왜 그날하필이면 왜 그 배를하필이면 왜 거기에하필이면 왜 당신이하필이면 왜 내가하필이면 왜 그때 하필은 언제 어디로 갈지 모른다하필은 이유를 모르고 배후도 동서남북도 모르지만하필은 때로 전능하기도 하다우연의 전능,우연은 급히 우연을 조립한다하필은 불현듯 순간의 어긋남에 불을 비춰주는 말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 잘못된 일이하필은 기필코 하필이란 말을 물어보게 하는 말하필은 참회도 없이 두 손을 붙들고 우는 말하필이 쌓아올린 하필 그런 삶- 시 ‘ ‘하필’이란 말’,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 중얼마 전 아주 소중한 책을 우편으로 받았다. 올해가 4·29 LA 폭동이 일어난 지 30주년이 되어 미주 한국문인협회에서 <4·29 LA 폭동 30주년 기념 작품집- 흉터 위에 핀 꽃>을 발간하였다. 온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힘든 시절인데도 이... -
우리는 어떻게 애도의 슬픔을 감당해야 할까
어느 나라에서는 사람은 세 번에 걸쳐 죽는대요첫 번째는 심장이 멈출 때두 번째는 흙 속에 몸을 매장할 때 세 번째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세상을 떠날 때사람은 쉽게 죽어 사라지는 게 아닌가 봐요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죽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요심장도 많이 필요하고요 그때까지는 살아있는 거라고요 공갈 젖꼭지 같은 것은 아니고요 아무 생각 없을 때도 몸에서 계속 자라나는 머리카락이나 손톱 발톱이나 폐처럼 그렇게 당신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면면히 자라나는 작은 영생, 잠시의 영원이라고요 -시 ‘작은 영생의 노래’, 시집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에서3월 초에는 ‘끝’이라는 단어가 뼈 시리게 다가왔다. 가까이 지내던 선생님 두 분과 선배 한 명이 세상을 떠나셨다. 삶이 모래시계 안에서 쏟아지는 모래처럼 숨 막히게 느껴졌다. 모래시계에는 출구가 없다. 관 뚜껑이 닫히고 하관을 하고 흙... -
고구마의 약속과 사랑의 전당
사랑한다는 것은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푸대 속 그런 데에 살아도사랑한다는 것은얼굴이 썩어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 올리는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는 여름의 내면, 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 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 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절벽까지 왔다절벽에 닿았다절벽인데절벽인데도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절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낭떠러지 사랑의 전당그것은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사랑은 꼭 그만큼썩은 고구마, 가슴을 절개한 여름 수박, 그런 으리으리한 사랑의 낭떠러지 전당이면 된다- 시 ‘사랑의 전당’, 시집 <단무지와 베이컨의... -
거리의 피아노를 위하여
모두의 피아노스트리트 피아노손열음이나 조성진이 아니어도 쇼팽이나 모차르트 곡이 아니어도아무나 자유롭게 아무거나 칠 수 있는 피아노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에 얼굴이 오이장아찌 같은 행인들이 잠시 걸음을 멈춘다 진주빛 피아노, 남색 피아노모두 바다에서 나온 색인데 누구나 칠 수 있고아무나 들을 수 있는 피아노환자들이 물가에 와서 기다리다가천사들이 가끔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아 물결이 동(動)할 때 연못 속으로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베데스다 연못가찬란한 물결과 빠른 프레스토가 환하게 빛을 뿌린다 - 신작시 <거리의 피아노를 위하여> 전문새해인데도 하늘은 어둡고 도시의 겨울 풍경은 음산하다. 당나귀가 물 먹은 솜이불을 지고 가는 것처럼 우울을 질질 끌고 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다가 코로나19 임시선별검사소 앞에 길게 늘어선 인파를 보았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