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르름에 담긴 슬픈 이야기
눈이 부시게 푸른 날이다. 자연이 고마운 나날이다. 이렇게 고마움을 제공하는 신록의 뒷면에는 이런 슬픈 이야기도 숨어 있다고 한다. 로마의 이야기꾼 오비디우스의 이야기다. 어느 날, 아폴로는 다프네를 마주치게 된다. 황금 화살을 맞은 아폴로는 사랑의 화염으로 불타오른다. 납 화살을 맞은 다프네는 아폴로의 사랑을 피해 달아난다.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쪽에서는 좋은데, 저쪽에서 싫어하는 상황을 말이다. 이런 상황에 처할수록, 덤벼드는 마음은 더욱 불타오르고 도망치는 사람의 마음은 더욱 얼어붙는다. 아폴로는 손가락, 어깨, 하얀 팔에 감탄하고, 드러나지 않은 부분은 얼마나 아름다울까를 상상하면서 다프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다프네는 바람보다 더 빠르게 도망쳤다. 다프네를 쫓는 아폴로의 말이다.“모든 약초들의 효력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지만, 아아, 사랑을 치료해 줄 약초는 어디에도 없구나.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나의 의술도 그 주인인 나에게는 쓸모가 ... -
적은 소탕 대상, 경쟁자는 소통 상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대해 말들이 들려온다. 안타까운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 가지는 짚고 가자. 선거는 전쟁이 아니다. 물론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전쟁에 가까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그럼에도 정치의 경쟁자가 전쟁의 적군은 아니다. 그는 어쩌면 직장 ‘동료’이고, 고향의 ‘벗’이며, 학교 ‘동창’이고, 생각의 ‘동지’이자 이익의 ‘동반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정치의 경쟁자도 공동체의 재난과 위기에는 서로 손을 맞잡고 힘을 합해야 하는 공동체의 친구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 선거는 전쟁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적은 소탕의 대상이지만, 경쟁자는 소통의 상대이다.선거는 끝났다. 하지만 사정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선거 과정에서 작동했던 언어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전쟁 영웅인 오디세우스는 “적군에게는 쓰라림, 친구에게는 달콤함”(<오디세이아> 6권 184행)을 주라는 명언을 남겼다. 틀린 ... -
막말보다는 웃음이 더 효과적이다
막말은 사실 아무런 생각 없이 하는 말이 아니다. 상대방을 공격함에 나름 효과가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 말이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자기편의 결집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다급한 처지를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그리 권장할 만한 언행은 아니다. 또한 막말을 하는 사람을 보기 흉하게 만들기에 전술적으로도 그리 추천할 만한 것은 아니다. 막말보다는 웃음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웃음을 일으키는 것이 연설가의 일임은 당연하네. 호의를 얻고자 하는 이에게 호감이 생기게 하는 것이 실은 즐거움이네. 어떤 사람이든 대개 답변하는 사람이 내놓은 한 단어에 담긴 예리함에 감탄한다네. 물론 때때로 날카롭게 공격하는 사람의 한마디도 그렇다네. 웃음은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저지하며 가볍게 만들고 두렵게 만들며 반박한다네. 또한 연설가를 세련되고 교육을 잘 받았고 기지가 넘치는 사람으로 드러내 준다네. 특히 엄중함과 가혹함을 부드럽게 만들며, 종종 아주... -
때론 양방향으로 말하는 연습도 필요하다
말 한마디로 정치생명이 좌우되는 장면을 자주 보게 된다. 말로 흥한 자, 말로 망한다는 말을 실감하는 시기이다. 아무튼 말의 힘이 가진 양면성을 현실적으로 뼈저리게 체감한 사람이 키케로였다. 오죽하면 “말의 저울(pondus verbi)”을 혀에 달고, “양방향으로 말하는(in utramque partem dicere)” 연습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까.“사실 이 능력을 연마하는 것이 연설가의 고유한 소임이라 하겠네. 하지만 이를 연마하는 일은 이미 철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네. (…) 어떤 주제가 주어지든지, 그들은 양방향으로 말을 아주 풍부하게 하곤 했다네.”(키케로 <연설가에 대하여> 제1권 263절)소위 경영학에서 말하는 “SWOT” 분석의 원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키케로가 말하는 ‘양방향으로 말하는 방식’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하지 않고, 내편과 네편의 강점과 약점과 기회와 위기에 대한 관찰과 분석을 ... -
잠시 생각을 멈추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말이 난무하는 시기이다. 한편으로 특정 경험, 특정 정보, 특정 이념, 특정 세력, 특정 정파, 특정 이해관계에 사로잡힌 행태인 ‘반지성주의’가 사람들을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누어 놓고, 다른 한편으로 소위 진영론과 음모론이 결합하여 사람들을 유혹하고 강요하는 시기이다. 이런 시기에는 헬레니즘 철학자들이 권했던 ‘판단 중지(epoche)’도 도움이 된다. 가끔은 판단을 멈추는 것도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판단 중지’란 헬레니즘 시대에 유행했던 회의주의 철학의 핵심적인 수행 방식이었다. 하지만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훈련을 요구하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우 높은 수준의 계산과 통찰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회의주의 철학자 피론(기원전 360~270)의 말이다. “회의(懷疑)는 현상과 판단 가운데에서 서로 반대되는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든 끌어내어 세울 수 있는 능력이다. 서로 맞서는 사태와 논증의 특성을 표현하는 같은 무게를 저울질해서... -
말이 권력을 결정한다
말과 권력의 관계를 꿰뚫어 본 정치가가 키케로다. 단적으로, ‘이상적 연설가(orator perfectus)’를 이상적인 정치가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다.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은 법정에서 같은 소리만 맴맴 대는 어떤 자도 아니네. 목청만 돋우는 자도 아니네. 돈만 챙기는 삼류 변호사도 아니네. 내가 진실로 이런 사람을 찾고 있네. (…)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아니라 연설가라는 이름을 ‘갑옷과 방패’로 삼아 자신을 지키면서 적들이 던지는 창과 화살 사이를 유유히 누빌 수 있는 사람이네. ‘말’이라는 창으로 사악한 자의 기만과 범죄를 만천하에 드러내어 시민들이 증오하고 그들을 단죄하게 만드는 사람이네. 자신에게 주어진 ‘지성’을 방패로 삼아서 무구한 사람을 재판에서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네. 삶의 무기력에 좌절하고 갈팡질팡 방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하고 원래 있어야 할 자리와 본래 가야 할 길로 가도록 만들 줄 아는 사람이네. 간악한 무리에게는 분노... -
말이 아니라 사람을 뽑으니까
말의 힘은 이중적이다. 말은 사실과 진실을 전하지만, 가짜와 거짓을 퍼뜨리는 데에도 능숙하다. 그래서 말은 종종 비판의 소리를 듣는다. 처칠의 말이다. “진실이 바지를 입기도 전에 거짓은 이미 세상의 절반을 돌고 있다.” 즉각성, 전체성, 광속성을 추구하는 디지털 문명이 기술적으로 이를 거들기에 더욱 실감나는 말이다.말의 전쟁인 선거가 시작되었다. 진실이 양말을 신기도 전에 거짓은 이미 온 동네를 몇 바퀴는 돌고 있다. 속도의 경쟁력에서 진실은 거짓을 이길 수 없다. 통상적으로 말의 전쟁이 끝난 뒤에 진실은 거짓을 간혹 이기곤 한다. 하지만 대개는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난 뒤이다. 가련한 진실! 과연 지켜줄 수 있을까? 어렵다. 허락 없이 들어온 말의 진실성을 따지기도 전에 또 다른 말이 들어오기에. 도대체, ‘거짓’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아예 없지는 않다. 말이 아니라 사람을 살피는 것도 도움이 된다. 결국은 말이 아니라 사람을 뽑는 것이므로. 아리스토텔... -
바람난 생각
사실상 마음의 주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생각이 안에 있지 않고 늘 밖으로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해서다. 시인 칼리마코스의 노래다. “나의 영혼이 반은 도망쳐버렸다. 나의 영혼이 소년들 가운데 누구에게 갔는지? 소년들이여, 그 도망자를 몰래 숨겨두지 말라고 몇번이고 명령했건만 (…) 변덕스러운 사랑에 눈멀어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서 헤매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지.”(칼리마코스, <경구> 41번)간결하지만, 촌철살인의 예리함이 돋보이는 노래다. 옳지만 무겁고 억압적으로 다가오는 말들, 진지함, 성실함, 엄중함, 엄격함, 건전함에 맞서 가볍고, 즐겁고, 유쾌하며, 재미있는 노래도 제 역할이 있고, 제 몫이 있음을 노래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른들이 말하는 세계의 이중성, 위선, 부자연스럽고 불의로 가득 찬 세계를 폭로하는 대신에 시인은 아이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노래한다. 자유를 즐기고 있는 마음이 유머러스하고 천연덕스럽다. ... -
말에 휩쓸려 다니지 않으려면
마음의 주인은 생각일까? 말일까? “말이 강력한 주인이다. 말은 아주 작고 보이지 않는 몸으로 가장 신적인 일을 수행한다. 두려움을 멈추고 즐거움을 만들며 연민을 불러일으킨다.”(<헬레네 찬사> 8장) 트로이 전쟁의 원흉인 헬레네를 변호하는 고르기아스의 연설에 나오는 말이다. 텅 빈 마음에 ‘희로애락’의 감정을 일으키고 가라앉히는 힘이 말이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기실, 생각이 주인인 것처럼 배웠지만 생각이 흔들리는 갈대라는 점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말을 더 들어보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얼마나 많은 것에 대해 거짓말로 설득했고 설득하고 있는가?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파악하며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면, 말은 힘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난 일을 기억하고, 지금 벌어지는 일을 살피며, 앞으로 닥칠 일을 내다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의 모든 일에 생각을 마음의 조언... -
말의 힘과 말의 일
말의 힘은 말의 일에서 드러난다. 키케로의 말이다. “사람의 모임과 결합은 가장 잘 유지된다. 누가 되었든 가장 가까운 정도에 따라 그에게 가장 많은 좋음이 주어질 때에. 하지만 사람을 연대하고 결합하는 본성의 원리는 더 높은 차원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차적으로 인간의 보편적인 사회성에서 드러나는데, 그 밧줄이 이성이고 언어이다. 가르치며 배우고 대화하며 토론하고 판단한다. 이것이 사람을 서로 묶고 결합시킨다. 본성의 어떤 사회성 덕분이다. (…) 들짐승도 용기를 가지고 있지만, 사자나 말이 정의, 평등, 좋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는다. 이성과 언어를 결여하기에.”(<의무론> 1권 50장) “가장 가까운 정도”와 “보편적인 사회성”이 대별된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혈연, 지연, 학연의 울타리 너머에 보편의 사회성이 강조된다. 해명인즉 이렇다.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는 혈연 중심의 부족 국가를 존속시켜 준 정신으로는 더 이상 지탱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