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전쟁 1년

고달픈 한국 생활 “고향 떠올리면 공포…구름 속에서 사는 듯”

글·사진 김송이 기자

아들과 고국 떠난 지 10개월…마리아의 또 다른 전쟁

염원 담아 쓴 ‘전쟁 그만’ 지난 21일 마리아 티모셴코가 우크라이나 국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국기에는 마리아가 폴란드 난민촌에서 만난 아이들의 손바닥과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전쟁 그만”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염원 담아 쓴 ‘전쟁 그만’ 지난 21일 마리아 티모셴코가 우크라이나 국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국기에는 마리아가 폴란드 난민촌에서 만난 아이들의 손바닥과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전쟁 그만”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폴란드 난민촌서 귀향하려다
‘핵전쟁’ 뉴스에 접고 한국행
언어 장벽에 외롭고 두려워
가족과 통화 때 전쟁 실감
아들은 “고향 가자” 졸라
“트라우마 겹겹이 쌓여가”

“엄마, 우리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해? 친구들 보고 싶어.”

지난 21일 충남 천안의 한 카페에서 만난 마리아 티모셴코(35)는 15세 아들이 고향인 우크라이나 부차를 그리워할 때마다 말문이 막힌다고 했다. 전쟁 발발 후 일주일이 지난 지난해 3월2일, 마리아는 아들을 데리고 34년간 살아온 고국을 떠났다. 그 후로 359일이 지났다.

지난해 1월 ‘군사갈등이 고조되고 있다’는 뉴스도, ‘비상 배낭을 싸두라’는 친구들의 조언도 마리아는 믿지 않았다. “21세기에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창문 밖으로 호스토멜 군사공항에 떨어진 포탄 소리가 들렸을 때 마리아는 전쟁을 실감했다. 2월24일. 전쟁이 시작된 그 날짜를 마리아는 잊지 못한다.

마리아는 “전쟁은 사람들 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전장에서 벌어지는 일인 줄만 알았다”고 했다. 전쟁 발발 후 일주일간 마리아는 아들과 집 지하실에서 포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너무 두려워서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못하던 마리아를 깨운 건 구조대원으로 일하던 친구였다. “러시아 군대가 다시 오기 전까지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며 재촉하는 그를 따라, 마리아는 키이우·폴란드로 피란길에 올랐다.

폴란드 난민촌에서 한 달을 머물면서 우크라이나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지만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뉴스를 듣고선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고려인 남편이 있는 대한민국 천안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지난해 4월이었다.

한국에 온 지 이틀 만에 부차에서 가족의 부고가 날아왔다. 4년간 함께 살던 삼촌이 ‘총에 맞은 채 숲속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살기 위해 도망쳐 닿은 한국은 마리아에게 ‘좋은 곳’이지만 ‘원해서 온 곳’은 아니었다. 전쟁, 피란, 낯선 곳에서 시작된 생활 모두 자신의 의지로 택한 것이 아니었기에 마리아는 “트라우마가 겹겹이 쌓이는 느낌”이라고 했다. 방문동거(F-1) 비자로 한국에 온 마리아가 법적으로 난민이 아니지만 스스로를 “난민과 다를 바 없다”고 느끼는 이유다.

마리아는 소통의 장벽이 한국 생활을 가장 외롭고, 어렵게 만든다고 했다. 한국어를 못하기 때문에 대화를 나눌 사람도, 누군가를 만날 방법도 없었다. 반전 시위가 열리는 서울에서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을 만나러 가는 게 유일한 창구지만, 상경에 3시간씩 걸리는 서울은 마리아가 자주 다니기 힘든 곳이다. 아들도 타국 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친구들은 다 부차로 돌아왔다는데 왜 우린 여기 계속 있어야 하냐”며 힘들어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마리아는 답을 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낮 시간에 맞춰 한국에서 밤늦게 온라인 수업을 들을 때, 화면 너머 보이는 친구들과 인사할 때가 “아들의 유일한 낙”이라고 마리아가 전했다.

우크라이나에 남은 가족과 친구들은 폐허가 된 부차·이르핀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전쟁 전처럼 출근하고, 차를 마시고, 공부한다. 영상통화 도중 공습 알람이 울려 놀란 마리아가 ‘지하실로 대피하라’고 소리치면, 마리아의 아버지는 “이러고 1년을 살았다”며 손사래를 친다.

마리아는 “고향 사람들은 현실을 사는데 나는 구름 속에 사는 것 같다. 부차로 돌아가야 내 삶도 현실이 될 것 같은데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큼 공포가 크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지난해 가을 한 차례 미뤘던 귀국 계획을 오는 4월에는 꼭 지키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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