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전후 70년 담화’

교묘한 ‘과거형’ 사과… 식민지배·침략엔 ‘일본’ 주어 생략

도쿄 | 윤희일 특파원

‘알맹이’ 없는 장문의 담화

‘미래지향’ 내세우며 역대 정권 담화에 ‘묻어가기’

무라야마 “솔직한 사과 없어”… 일 야당들도 비난

14일 발표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는 과거 담화보다 양은 크게 늘었지만 내용은 빈약했다.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주체를 생략하는 등 ‘교묘한 화법’을 동원, 진심을 담지 않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이번 담화의 분량은 4000여자로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가 발표한 ‘전후 50년 담화’의 1300여자에 비해 3배가량 많았다. 대부분의 내용을 ‘미래지향’에 할애했지만 주변국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훨씬 약했다. 이는 총리 자문기구인 ‘21세기 구상 간담회’가 지난 6일 아베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자문기구는 ‘국제법상 침략의 정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침략이라는 표현에 대해 복수의 간담회 구성원이 이견을 제기했다”는 등의 주석을 달았다. 이번 담화에서 ‘과거형’으로 언급된 ‘사죄’는 아베 총리의 의중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20세기 전시하에 많은 여성들이 존엄과 명예에 깊은 상처를 입었던 과거를 가슴에 계속 새기겠다”고 얼버무렸다.

특히 이번 담화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 불가피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열강들이 식민지 경제를 블록화하면서 일본이 고립됐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무력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러일전쟁으로 아시아·아프리카 국민들이 용기를 갖게 됐다”고도 주장했다. 영국 BBC방송은 아베 총리가 “20세기 일본의 역사를 반제국주의 역사로 만들려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은 거의 의식하지 않은 듯, 서구와 중국의 환심을 사는 데에 몰두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베 총리는 애초부터 식민지 지배와 침략, 반성과 사죄 언급은 최소화하고 국제사회에서의 일본 역할 등 이른바 ‘미래지향’을 강조한 담화를 내고 싶어 했다. 그런데 한국·중국은 물론 연립여당인 공명당까지 역대 담화의 핵심표현을 담을 것을 요구하자 마지못해 흉내에 그친 담화를 낸 것으로 분석된다.

이번 담화에 대해 일본 내에서도 비판이 잇따랐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초점이 흐릿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며 비판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은 전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식민지 지배, 침략, 사과 같은 무라야마 담화의 키워드를 최대한 희석했다”며 “거론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었던 모양”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아베 담화에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 나쁜 것이었다고 솔직하게 사과하는 문장은 없었다”면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했다는) 인상은 없다”고 말했다. 또 아베 총리가 적극적 평화주의를 얘기했으나 그 내용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아무 설명도 없었다고 비판했다.

야당인 민주당의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대표는 ‘사과’와 같은 키워드가 인용 형태로 언급돼 “총리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전해져 오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공산당의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위원장은 “자신의 말로 반성과 사과를 일절 언급하지 않은, 사기와도 같은 내용”이라고 비판했다. 무라야마 담화 계승을 요구해온 학자·전직 외교관 모임은 “앞선 대전이 침략임을 확실히 말하지 않고 회피하면서 무라야마 담화의 키워드들을 억지로 꿰어맞춰 겉모습만 꾸미려 한 괴로운 담화”라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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