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왕좌의 게임’? 고위직 자녀들 인질로 잡은 왕세자

이윤정 기자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왼쪽)와 무함마드 빈 나예프 왕자 |위키피디아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왼쪽)와 무함마드 빈 나예프 왕자 |위키피디아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피의 숙청’이 끝나지 않은 것일까. 35살의 사우디 ‘정권 실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MBS)가 캐나다로 망명한 사우디 고위직 사드 알자브리 박사의 자녀들을 납치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알자브리 박사는 서방에 알카에다 테러 정보를 알려 수많은 목숨을 구한 인물이다. 하지만 MBS의 잠재적 왕위 경쟁자 무함마드 빈 나예프 왕자(MBN)의 오른팔이라는 점에서 MBS의 다음 타깃이 됐다. 지난 3월 사촌형인 MBN를 비롯해 작은아버지인 아흐메드 빈 압둘아지즈 왕자 등 왕위 경쟁자 11명과 그 측근들을 반역죄로 체포하며 ‘왕권 다지기’에 나선 MBS는 미국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현실로 불러들인 듯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BBC는 지난 3월 16일 알자브리 박사의 자녀 오마르(21)와 사라(20)가 리야드의 자택에서 사우디 보안수사대에 납치됐다고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알자브리 박사의 장남 칼리드는 “사우디 보안수사대원 50여 명이 집으로 들이닥쳐 동생들을 끌고 가면서 CCTV 메모리칩까지 제거했다”며 “가족이 동생들을 백방으로 찾아봤지만 현재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BBC에 말했다. 칼리드는 “MBS가 아버지를 사우디로 불러들이기 위해 동생들을 인질로 삼았다”면서 “아버지가 귀국하는 순간 체포돼 숙청당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우디 당국은 알자브리 자녀 납치·구금에 대해 공식입장을 밝히지 않았다고 BBC는 전했다.

MBS가 알자브리 박사 체포에 혈안이 된 이유는 사우디의 독특한 왕위계승 전통 때문이다. 1932년 초대 국왕에 오른 압둘아지즈는 1953년 숨을 거두기 전 “왕위를 형제끼리 연장자 순으로 상속하고 아들에겐 물려주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형제계승’이 전통처럼 이어졌지만 7대 현 국왕 살만은 이 전통을 깨고 아들 MBS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MBN은 MBS의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 중 한 명이다. 2017년까지 내무장관이었던 MBN은 알카에다 테러 정보를 영국 해외담당 정보기관 MI6와 파이브 아이즈(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정보국에 알리기도 했다. 서구에 존재감을 전하며 MBS보다 먼저 비공식적으로 사우디 차기 왕 후보로 거론된 인물이다.

(왼쪽부터) 사드 알자브리 박사(왼쪽사진 빨간 원). 장남 칼리드와 납치된 오마르, 사라 |BBC캡처

(왼쪽부터) 사드 알자브리 박사(왼쪽사진 빨간 원). 장남 칼리드와 납치된 오마르, 사라 |BBC캡처

알자브리 박사는 MBN을 도와 서방 정보기관과의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2010년 알카에다가 프린터 잉크 토너를 폭발물로 개조해 시카고행 비행기에 실었다는 정보를 MI6에 전달한 사람도 알자브리 박사다. 그는 알카에다에 심어둔 스파이로부터 폭발물 해체에 필요한 암호코드까지 받아내 MI6에 알렸다. MI6는 영국 이스트미들랜즈공항에서 출발하려던 비행기에서 폭발물을 찾아내 승객 수백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MI6 전직 요원은 “알자브리 박사는 잔혹하고 폭력적인 방식이었던 사우디의 대테러 전략을 디지털 데이터에 바탕을 둔 현대적인 접근법으로 바꾼 인물”이라고 BBC에 말했다.

하지만 2017년 MBS가 왕세자로 책봉되자 알자브리 박사도 숙청 리스트에 올랐다. 그는 재빨리 캐나다로 망명했지만 MBS는 여전히 MBN과 그의 측근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며 제거하려 하고 있다고 BBC는 전했다. MBS는 그동안 유가변동에 취약한 사우디 경제 구조를 개혁하겠다는 ‘비전 2030’ 프로젝트를 추진해왔지만 코로나19 여파로 국제유가가 떨어지면서 개혁 원동력을 잃고 있다. ‘왕좌’가 위태로워지자 경쟁자를 제거하는 움직임에는 더 가속도가 붙었다. 지난 3월 왕권 경쟁자와 그 측근들을 반역죄로 체포했는데 사우디에서 반역죄는 최고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야심이 많고 호전적인 그는 어릴 적부터 ‘손자병법’과 같은 병법서를 즐겨 읽었다. 국내 반대파 숙청은 물론 외국 수장과 언쟁을 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 3월 원유 감산을 두고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신경전을 벌이며 러시아의 원유 감산 합의를 받아냈다. 여성 운전 허용, 비키니 착용 가능 관광특구 설치 같은 파격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와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국제 정치 감각이 있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사우디 왕실에 비판적인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를 지시했다는 의혹과 함께 고위직의 자녀까지 납치해 ‘왕좌’ 구축에 이용하는 등 ‘피도 눈물도 없는’ 젊은 지도자라는 비판도 동시에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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