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3세 시대 영국 왕실과 영연방의 미래는?

박은하 기자

‘대영제국’ 후광 대신 사생활 그림자

기후이슈 적극 행보, 정치중립 논란도

호주·자메이카 등 군주제 폐지 움직임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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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하면서 찰스 3세(74)가 왕위를 승계했다. 찰스 3세 앞에는 영국 역사상 최장 기간인 70년을 재임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공백을 메우는 동시에 연합왕국 및 영연방의 구심력을 유지하고 왕실 현대화에도 나서야 하는 등 까다로운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찰스 3세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누린 카리스마와 왕실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70년 만에 여왕 없는 영국 왕실

영국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거리에 마련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추모 공간에서 9일(현지시간) 한 어린이가 꽃다발을 놓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영국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거리에 마련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추모 공간에서 9일(현지시간) 한 어린이가 꽃다발을 놓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작가 사이먼 쿠퍼는 르몽드 칼럼을 통해 “엘리자베스 여왕은 계급사회의 최상위에 있었다”면서도 “사회의 양극화를 완화하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분열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대영제국 시대 후광을 입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개인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이제 왕비가 된 커밀라 파커 볼스와의 불륜 의혹과 첫 부인이었던 다이애나비의 비극적 죽음 등 사생활 논란에 휩쓸린 찰스 3세의 인기는 엘리자베스 여왕보다 훨씬 낮다. 여론 조사기관 ‘유고브’가 지난 5월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찰스 3세는 56%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같은 조사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81%, 아들 윌리엄 왕자는 77%를 기록했다. 영국을 넘어 ‘글로벌 군주’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강력한 소프트파워를 발휘했던 영국 왕실의 존재감 하락이 불가피해 보인다.

공화제 여론 앞에 ‘작고 겸손한 왕실’ 추구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달리 기후변화 대응과 환경오염 등 여러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해온 찰스 3세가 정치적 중립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찰스 3세는 2004~2005년 농업, 유전자 변형 식품, 지구온난화, 사회적 소외,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편지와 메모를 정부 각료와 의원들에게 보낸 사실이 몇 년 뒤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나 ‘간섭하는 왕세자’란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은 바 있다.

찰스 3세의 전기작가 페니 주너는 텔레그래프에 “내 짐작으로는 찰스 3세가 명백히 드러나는 방식으로 정치에 간섭하지는 않겠지만 정당하게 총리를 만나는 자리에서 선왕보다 훨씬 분명하게 자기 의견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총리는 정기적으로 국왕을 만나 국정 현안에 관해 보고한다.

왕실 폐지를 주장하는 공화주의자들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망을 왕실 페지를 공론화하는 호기로 본다. 군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단체인 리퍼블릭의 그레이엄 스미스 대표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발표 직후 24시간 동안 트위터 팔로어가 2000명 늘었고 회원 가입도 늘고 있다고 가디언에 전했다. 올해 초 유고브 조사에서 영국의 군주제 유지 여론은 62%로 여전히 우세하지만 10년 전(73%)보다 크게 낮아졌다.

찰스 3세는 ‘작고 겸손한 왕실’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낼 전망이다. 그는 왕세자 시절부터 왕위 계승자인 윌리엄 왕자 가족을 제외한 다른 왕족에 대한 지원과 특혜를 줄이겠다고 밝혀 왔다. 스웨덴 왕실 등을 참고해 왕실의 권한을 축소하고 왕실 재산을 국가에 환원하는 방안도 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미성년자 성매매 및 성폭행 혐의로 재판받고 있는 찰스 3세의 동생 앤드루 왕자는 왕실에서 배제됐다.

찰스 3세 국왕이 12일 카밀라 왕비와 함께 런던 웨스트민스터홀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여해 연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찰스 3세 국왕이 12일 카밀라 왕비와 함께 런던 웨스트민스터홀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여해 연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탈식민’ 시대 영국 왕실 위상 변화 불가피

영연방의 구심력은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영국 출신 이주민 비중이 적고 식민지배 착취의 현장이었던 카리브해 국가들은 공화국 전환에 특히 적극적이다. 개스턴 브라운 앤티가바부다 총리는 여왕 사후 사흘 만인 지난 10일 “우리가 진정한 주권 국가임을 확실히 하고, 독립의 고리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라며 군주제 폐지를 위한 국민투표를 향후 3년 이내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앤드루 홀니스 자메이카 총리는 3월 윌리엄 왕세자 부부가 자메이카를 방문했을 때 자메이카가 영국 왕실과 결별하고 공화정으로 독립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자메이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노예제와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움직임도 일었다. 벨리즈, 바하마에서도 공화제 전환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지난 6월 공화국 담당 차관보를 임명한 앤서니 앨버니즈 호주 총리는 여왕 사후 “이 시기 공화제 전환 이야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선을 그었으나 호주의 공화제 지지 여론이 높아 전환은 시간 문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캐나다는 61%가 공화제 전환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지만 정부가 전환에 미온적이다.

다만 카리브해나 아프리카 소국들은 영연방을 국제무대에서 발언력을 키울 수 있는 무대로 삼을 수 있어 영연방을 쉽게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AFP통신은 전망했다. 앤티가바부다도 공화국 전환 이후에도 영연방에 남고 싶다고 밝혔다. 영국 역시 브렉시트 이후 영연방과의 연결을 다시 강화하려는 모양새이다.

호주 시드니대학의 역사학자 신디 맥크리리는 기후 변화 대응에 적극적인 찰스 3세의 모습이 영연방의 결속을 다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영연방 구성원 간의 평등한 관계가 더욱 요구될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영국 국왕이 영연방 수장 지위를 맡는다는 규정이 깨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가디언 일요판 옵서버는 11일 사설을 통해 “모든 세대에 걸친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여왕을 잃은 것은 영국인들에게 힘겨운 일이고, 선왕의 책임을 이어받아야 하는 여왕의 장남에게도 힘겨운 일”이라면서 “앞으로 공적 의무를 수행해야 할 찰스 3세에게 힘과 용기, 그리고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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