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상 | 한국영상자료원 프로그래머

선망과 질시의 원시적 생명력

전쟁으로 남자들이 모두 자취를 감춘 어느 산골. 이웃 과부 점례가 인민군 탈영병을 산속 토굴에 숨겨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과부 사월은 점례를 협박하여 숨겨준 곳을 알아낸다. 밤에 토굴로 숨어든 사월을 본 사내는 쫓아내려 하지만 순사에게 알리겠다며 능청스럽게 협박하는 그녀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자신도 여자라며 옷을 벗는 그녀에게 사내는 기가 질린 목소리로 묻는다. “그럼 당신들 둘이서 날 짐승처럼 길러보겠단 말이오?” 하얀 등을 드러낸 여자가 콧소리를 내며 말한다. “아무려면 워뗘? 아, 살고 볼 것이제~!” 마치 1990년대에 유행했던 ‘…부인’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지만 출처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40여 년 전에 개봉된 <산불>(1967·사진)이다. 욕정에 사로잡힌 이 여성, 한편으로는 대담하고, 또 달리 보면 그 대담함이 어떤 코믹한 느낌까지 자아내는 이 여배우의 이름은 도금봉이다.

[한국의 여우(女優) 그들을 말한다](10) 도금봉

도금봉이 이렇게 성적 매력으로 어필하는 역할을 자주 맡게 된 것은 어쩌면 데뷔작 때부터의 숙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957년도에 데뷔한 그녀는 기생 황진이를 영화화한 첫 작품 <황진이>의 주연으로 발탁된 대형신인이었다. 악극단에서 활동을 하면서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받은 터에 데뷔부터 주연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그녀는 이 작품에서 관능적이고 요염한 연기로 주목 받았다. 이후 그녀에겐 이런 성격의 역할이 자주 주어졌는데, 이를테면 <연산군>(1961), <폭군연산>(1962)의 장녹수 역이나 <천하일색 양귀비>(1962)의 양귀비, <백설공주>(1964)의 태수비 같은 역이다. 그녀의 관능성에 갈수록 음모적이거나 영악한 성격이 덧대어진 것이다. 이런 성격은 <월하의 공동묘지>(1967)나 <내시>(1968)로 가면서 더욱 짙어졌다. 주인공의 어머니 역할로 나온 <어제 내린 비>(1974)에서조차 돈 많은 노인에게 팔려가는 ‘음란한’ 어머니였던 것을 보면, 그녀는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역동적 여성성에 대한 도덕적 단죄를 스크린 위에서 대신한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한편 ‘생활력 강한 여성’은 도금봉 필모그래피의 또 다른 갈래인데, 그 경제적인 역동성도 곧잘 도덕적 위험지대로 빠져들곤 한다. <새댁>(1962)이나 <또순이>(1963)에서 도금봉이 맡은 역할은 서민적인 삶 속에서 알뜰하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젊은 주부다. 특히 그녀에게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또순이>에서 그녀는 쥐덫 팔기, 떡장수, 연탄배달 등 돈을 벌기 위해 온갖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억세게 생활력이 강한’ 여성상을 연기한다. 이는 쿠데타 이후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구호로 내걸었던 박정희 정권 하에서 장려 받은 여성상이었다. 그러나 ‘또순이’ 도금봉의 이와 같은 억척스러움은 후기작으로 갈수록 왜곡되고 뒤틀렸다.

<젯트부인>(1967)에서 그녀는 일수로 돈을 벌어들이는 극성스러운 ‘치맛바람’의 주인공을 맡았다. 광고에서부터 “또순이 도금봉이 열연하는 젯트부인”이라 하여 ‘또순이’ 이미지의 계승자임을 선언한 작품이지만, 여기서 도금봉은 성실하고 인정 많은 남편을 무시하고 악랄한 사채업에 뛰어들었다가 패가망신하는 여성이 되어 부정적 이미지를 한 몸에 짊어진다. <아름다운 팔도강산>(1971)에서도 그녀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손님을 더 받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시부모를 박대하는 며느리가 되고 있다. 초기에 각광 받았던 당찬 활동성과 경제적 능력은 오히려 단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그녀의 에너지에 대한 선망이 얼마나 컸던가에 대한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무지렁이 촌부에서부터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요부, 그리고 천하를 호령하는 왕비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의 폭은 그 어떤 여배우보다 넓었고, 또 강렬했다. 그녀가 체화했던 원시적인 생명력은 뭇 남성들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압도적이었고, 그래서 더욱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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