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下)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김상봉-박명림 서신대화
국가의 바탕은 ‘공동선’, 그 최종 결정자는 ‘인민’

김상봉 선생님 안녕하셨는지요. 저희가 이 대담을 시작하자마자 공화국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두 개의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말씀하신 미네르바 구속과 용산참사입니다.

먼저, 미네르바 구속은 공화국 시민으로서 공동체의 공적 문제에 대한 의견제시 자체를 봉쇄한다는 점에서 민주국가에서 상상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정부의 오류가능성을 부인하는 독재적 발상이지요. 어떤 정부와 지도자도 비판에서 면제되어선 안 된다는 원리야말로 민주주의의 최소 요건입니다. 자기 오류가능성의 인정은 민주주의는 물론 대화와 소통의 필수요소이지요. 더욱 문제는 국민 나누기입니다. 미네르바의 학력·직업과 비판 자격을 연결하는 데서 저는 1등국민과 2등국민, 엘리트와 일반 시민을 나누는 무서운 차별의식을 읽습니다. 학력고하와 직업유무가 공화국의 시민자격, 특히 정부비판을 포함한 공적 참여자격의 허용과 배제의 기준이라면 이것은 스스로 공화국이기를 부정하는 자기모순입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주체는 외려 공론형성 역할의 부재로 미네르바의 등장을 초래한 ‘자격있는 전문가들과 제도언론’이지요.

용산참사는 국가의 자기부정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2)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下)

용산참사는 국가의 존재이유(raison d’etre)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합니다. 저는 21세기 한국사회 지평에서 공화국을 논할 때 출발은 바로 국민의 생명과 행복을 위한 바른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용산참사를 보며 저는 키케로가 말한 “민중의 행복이 최고의 법”이라는 언명에 대한 동의여부는 법철학적 논의로 미루더라도 -저는 용산참사를 보며 이를 “민중의 생명이 최고의 법”이라는 말로 바꾸어 적극 수용했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사회적 실존을 둘러싼 거의 모든 문제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로부터 연유하기 때문입니다- ‘민중의 행복’을 합당한 ‘통치체제’의 문제로 연결시킨 로크의 혜안을 바로 떠올렸습니다.

오늘날 우리 삶에서 정치와 연결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으며, 정치를 바로 세우지 않고 바로 설 수 있는 것도 거의 없습니다. 즉 용산참사는 이익(갈등)의 문제요 질서와 법률의 문제이면서, 무엇보다 정치의 문제이고, 그를 통한 실존과 생명 보호의 문제이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의 본질을 드러내줍니다.

국가가 국민 일부(철거민·세입자)의 행복은 물론 아예 생명을 앗아가며 다른 이익을 법률·질서·공권력의 이름으로 보장하려 할 때, 생명을 박탈하며 보호해야 할 그런 가치가 과연 존재하나요? 단연코 없음에도 국민 일부를 테러 집단으로, 좌파로 만들어 생명을 박탈했기에 이것 역시 국가의 자기부정입니다.

배려·참여·정의를 공동가치로

그동안 저는 시민적 덕성에 의해 형성되는 공동선을 공화국의 핵심요소로 여겨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는 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서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이상의 일정한 합의를 말합니다. 시민적 헌신과 충성의 대상이기도 하지요. 잠정적으로 배려와 연대, 참여와 책임, 정의와 중용을 21세기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선으로 여겨봅니다. 역사를 볼 때 물질과 풍요의 부족보다는 가치·정신·합의의 붕괴로 인한 공적 헌신과 충성의 철회, 분열이 훨씬 중요한 공동체 몰락의 요인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경제적 불평등을 제한하려한 것은 바로 참여·시민덕성·평등·중간계급 함양이라는 공화적·공공적 지표를 중시했기 때문이지요.

시민적 덕성에 기반한 공동선과 유리되어 발전해온 공화국은 없습니다. 이때 시민 덕성은 개체적 덕성과 집합적 덕성 모두를 포괄합니다. 왜냐하면 관용·대화·연대를 통해 형성 가능한 공동선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사회적 가치의 출발은 개체로서의 인간 존재를 전제하지요. 동시에 공동선은 개체적 덕성의 단순한 총합을 넘는, 어떤 공공성과 일반성을 담아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공동선을 말할 때는 전체와 부분,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균형적 문제의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참된 공화국을 말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의 구축을 통해 비로소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자유·이익·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화국 논의가 결코 국가주의나 전체주의로 나아가서는 안 되는 소이이지요.

둘째는 인민주권과 자기결정의 원칙입니다. 누가 공동체 가치와 정신의 최종 결정자여야 합니까? 공화국의 공공성의 최초 출발 및 최종적 완성은 인민에게 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공적인 문제에 참여하고 또 책임을 지게 되지요. 공동선은 참여를 통해 ‘정치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인민은 공공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공화적 시민을 말합니다. 아렌트가 말하듯 공공문제에의 참여는 개인과 공동체를 통합시켜주는 계기입니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공공문제와 공론형성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 없이는 공동체의 발전도 어렵지만 전체사회의 발전 없는 내 삶의 개선 역시 어렵기 때문입니다. 공화국은 곧 참된 시민덕성에 의해 밑받침되는 공화적 시민국가입니다.

직접민주주의 확장이 필요

결국 인민주권은 치자와 피치자는 동일하다는 민중의 자기지배의 원리로부터 발원하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말합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민주주의와 선거주의는 결코 동일하지 않지요. 선거로 인한 정부 운영권한의 위임이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닐 뿐더러 선거시점의 선택을 갖고 시민에게 정부의 무능과 실정의 책임을 묻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위기에 직면한 근본 이유는, 그리하여 공화국이 점점 더 소수를 위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대의민주주의를 유일 대안으로 강조하는 동안 인민주권과 자기결정의 원칙을 폄하하고 배제한 데 있다고 봅니다.

‘4권분립’ 등 혁명적 창안을

인민주권 대신 국민주권 원리에 기반해 직접민주주의가 아닌 대의민주주의를 선택했으나 최초의 출발과는 달리 그것이 정당·대표·파당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안 점점 인민의 이익·주권·결정권한은 축소해왔기 때문입니다. 대표와 시민사회, 정당과 인민의 유리는 이제 일반적 현상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정권창출을 제외하면 오늘날 정당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거의 없습니다. 대의와 공론형성 기능 자체도 정당, 인터넷, 언론, 시민단체로 4분되어 있고요. 인민주권 원리의 복원을 통한 직접민주주의 요소의 확장이 없다면 대의민주주의는 상시 불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여민주주의와 심의민주주의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입니다.

셋째로 공화국의 핵심 요건의 하나는 말씀하신 법의 지배입니다. 권력과 재산의 무한 추구를 일정한 법률과 규율 아래에 두지 않고는 공화국 발전은 고사하고 형성·유지될 수조차 없습니다. 즉 공화국의 필수요건이자 합의체계로서의 법 지배는 권력의 자의적 행사, 이익의 제한없는 추구, 사회의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한 최저 준거입니다. 법은 권력이나 재산이 아니라, 바로 공동선의 구체적 구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법의 지배는 국가와 인민을 제약하는 동시에 보장하는 즉 질서와 자유, 의무와 권리 보호의 이중 요체이지요. 그 점에서 법은 뜻 그대로, 공정과 형평을 벗어나선 존재할 수 없지요. 때문에 법의 공정성이 무너진 사회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법의 지배는 어떻게 되었나요? “법 앞의 평등”처럼 ‘법’과 ‘평등’을 모두 조롱하는 언설도 없습니다. 두 측면에서 오늘날 법의 지배는 무너졌습니다. 하나는 권력과 재산의 크기에 따라 좌우되는 공정과 형평의 파괴이며, 둘째는 법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민주주의 억압입니다. 후에 상술할 수 있어 간략히 말씀드리면, 오늘날 법의 지배는 공정성과 형평성을 상실해 권력의 지배나 재산의 크기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거나 아예 권력과 재산을 위해 봉사하고 있으며, 동시에 좌우독재국가들이 그러하였듯 법치의 이름으로 참여·비판·민주주의를 봉쇄하려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법이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헌정민주주의를 넘어, 민주주의가 법치를 규정하는 민주헌정주의를 바람직한 공화국을 위한 대안으로 여깁니다.

끝으로 견제와 중용, 타협과 균형을 추구하는 권력분할입니다, 참된 공화국에서는 대통령·의회·법원 어떤 부문도 권력을 독점하거나 과점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기존의 3권분립 체제는 너무 낡았을 뿐만 아니라 빈번한 권력과 재산의 과점에 직면하며, 인민주권을 반영한 참여민주주의를 실천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혁신적 고안 없이는 오늘날 꽉 막혀 있는 한국의 정치, 민주주의, 헌법, 공화국 담론과 실천을 고양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스, 로마, 베네치아, 영국, 프랑스, 미국을 포함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제시했던 사례들은 늘 혁명적 제도 창신을 통해 이를 추구해왔습니다.

인민주권과 참여민주주의를 강조하며 저는 그동안 두 차원의 새로운 견제와 균형을 제안해왔습니다. 하나는 정부, 대의기제(정당·언론), 시민사회 사이의 새로운 3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입니다. 정부 내의 ‘수평적’ 3권분할을 넘어 ‘수직적’ 권력분할이 절실합니다. 둘째는 감독부(監督府) 신설을 통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3권분립을 넘는 4권분립 및 그들 사이의 새로운 길항과 균형입니다. 감독부는 감독·검찰·시장관리·대표선출과 조정·국민보호 기능을 갖는 기구들-예컨대 감사원, 검찰, 공정거래위, 방송통신위, 국가인권위 등-을 3부로부터 떼어내어 독립, 국민과 대면해 해당 사안을 처결합니다. 현재의 3권분립 체제에서는 특별히 정당, 언론의 공론과 대의기능 왜곡을 고려할 때 선거와 저항을 제외하면 시민들이 직접 의사를 반영할 정부조직은 거의 없습니다.

공정·형평성 모두 무너진 법

이제 우리 사회는 반공국가건설, 경제발전, 민주화의 압축달성 속에 지나쳐온 공동체 가치와 이상, 공적 시민덕성에 대해 일대 토론의 난장을 전개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참된 공화(국)의 정신으로 여러 가치들의 중간·중산·중앙·평균 개념보다는 중용·형평·융섭·균형 개념을 더 좋아합니다. ‘기계적 중간’ ‘산술적 평균’이 아니라 ‘움직이는 중용’ ‘정치적 형평’이지요. 지금이라도 우리가 움직이는 중용을 찾아 시민덕성에 기반한 공동선, 공공성이 무엇인지 깊은 사회적 개인적 성찰을 진행하지 않는다면 국가·사회의 발전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의 관찰이 개인적 편견이 아니기를 바라며 오늘의 편지를 맺습니다. 평안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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