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취한 사람들

최민영 | 미디어기획팀

이상한 연말이다. 이상한 사건들이 잇따라서다. 심사가 뒤틀린 재벌 3세가 이륙 직전의 비행기를 제멋대로 후진시켰고, 관현악단 경영자는 직원들을 성희롱하고 폭언을 일삼았으며, 대학교수들은 학생과 인턴들을 성추행했다. 이른바 ‘사회 지도층’을 숙주로 삼아 이성을 마비시켜 사회적 몰락을 유도하는 신종 ‘연가시’라도 암암리에 퍼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보통 사람들의 눈에 미친 짓으로 보이는 이 같은 행동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뇌가 권력에 중독되기 때문’이라고 뇌과학자 이안 로버트슨은 저서 <승자의 뇌>에서 지적한 바 있다. 권력의 경험이 뇌를 바꾼다는 것이다.

[기자칼럼]권력에 취한 사람들

승리를 경험하면 혈중에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도파민 분비가 촉진되면서 뇌 역시 이에 더 민감해지도록 변화한다. 그래서 더 큰 쾌감을 얻으려면 더 큰 승리가 필요하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코소보 사태 개입에 성공하자 이후 유권자들의 반대에도 이라크전 개입을 결정했다.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권력욕과 밀접한 성욕 때문에 추락한 경우다. 당초 나라를 혼란에서 구하겠다며 결연히 나선 엘리트 청년 장교가 세월이 지나 철권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독재자가 되는 것 역시 뇌가 권력에 흠씬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에의 중독은 다른 중독과 메커니즘이 동일하다고 로버트슨은 지적한다. “돈이든 섹스든 권력이든 혹은 마약이든 간에 뇌의 보상체계에 도파민 분출을 강력하고도 반복적으로 촉발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중독에 대한 채울 수 없는 갈망을 거대한 홍수처럼 풀어놓을 수 있다.” 총체적 위기에 빠져서 ‘미친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전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두 시간도 거뜬히 떠드는 횡설수설 장광설로 유명했는데, 살짝 풀린 그의 눈은 마약에 취한 상태나 거의 비슷해 보였다.

대단한 권력자들만 이 같은 타락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람은 어느 지위에 오른 순간 마음의 에너지가 다르게 쓰인다”며 “평소에 도덕적인 사람도 본능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성추문으로 낙마한 전 청와대 대변인이나 모 지검장의 사례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 같은 ‘권력 중독’을 예방하고 폭주를 막기 위해 시스템은 존재한다. 정치에는 민주주의에 기반한 직접선거가 있고, 기업에는 이사회와 감사가 있고, 시민 간에는 법률과 예의가 있다. 이것은 한 사회의 지속성을 위한 모두의 약속이며 규칙이다.

그 규칙에서 파열음이 들리는 건 아닌지 요즘 귀를 자꾸만 후비적거리게 된다. ‘사람’보다 ‘갑을’이 더 부각되는 자본사회의 천박함 때문이다. 서울 강남 모 아파트에서 벌어진 경비노동자의 분신에 이은 주민의 경비원 폭행사건도 그 살풍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밥줄을 쥔 자’가 신처럼 군림하려 든다. 무릎을 꿇리고 욕설을 퍼붓는다. 밥줄이 매달린 가련한 사람들은 칼날 같은 모욕감을 안을 수밖에 없다. 한 심리학자는 비행기에서 쫓겨난 대한항공 사무장의 심리적 붕괴가 삼풍백화점 사건 피해자와 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지적했다.

‘갑’들은 그 ‘갑질’을 통해 보통 우월감을 추구하거나, 마음속 열등감 같은 어두운 그림자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던진다. 확실한 것은 그 ‘연가시’ 같은 권력중독에 심리적으로 점령당한 권력자들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말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갑’들의 불행한 개인적 추락은 물론이고, ‘갑’들에게 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행감 역시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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