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 뭐길래]11회 ‘진짜 페미니즘’? 다시 논쟁을 시작한다

손희정 | 영상문화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

경향신문 뉴스큐레이션사이트 ‘향이네’가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기획에 참여한 필자들은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 모두의 삶에 풍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학문이자 운동”이라고 말합니다. ‘페미니즘이 뭐길래’ 함께 읽어보시죠. 연재글 의견은 h2@khan.kr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진짜 페미니즘’을 찾아서
- 타령을 도태시키고 다시 논쟁을 시작할 때

‘진짜 페미니즘’ 타령들

진짜를 내놓으라고들 난리다. 페미니즘 말이다. 이런 진짜 타령은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역사도 오래된 이 ‘진짜 페미니즘 타령’에서 김규항은 1990년대 이후 한국 페미니즘의 주류는 부르주아 엘리트 여성이었다면서 그것을 ‘그 페미니즘’으로 명명했다.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일다 김규항과 한겨레의 ‘여성운동 물먹이기’) 그러나 그는 한국 여성노동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참해 온 것이 페미니스트들이었다는 것과 노동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그 ‘남성중심노조’가 사측과의 거래에서 어떻게 손쉽게 여성동지들을 내버렸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10년을 훌쩍 넘어 2015년. 김태훈은 한국 페미니스트는 밥그릇 싸움에만 혈안이 된 “무뇌아적 페미니스트”라고 손가락질 했다. 역사적 사실에서부터 현실진단에 이르기까지 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던 그의 글은 페미니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당혹스럽게도 ‘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많은 남성들이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그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페미니즘의 ‘밥그릇 싸움’을 폄하하고 비아냥 거렸다. 하지만 세계의 대부분의 운동은 일종의 밥그릇 싸움이 아닌가? 밥그릇이야말로 생존의 조건이다. 계급, 성별, 신체조건 등에 따라 밥그릇이 불평등하게 나누어질 때, 그것이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기적인 투정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권리들이 누구에게만 주어졌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편파적 권리의 성격을 바꾸려고 한다는 점에서 지배적인 세계관을 뒤집는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 될 수도 있다.

칼럼니스트 김태훈씨가 패션잡지 <그라치아> 48호에 기고한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의 칼럼.

칼럼니스트 김태훈씨가 패션잡지 <그라치아> 48호에 기고한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의 칼럼.

최근에는 고종석이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내의 차이에 눈을 감음으로써) 페미니즘의 운동을 고립시켰다”면서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은 계급, 인종, 식민, 장애 등 차별과 배제, 폭력과 억압을 만들어 내는 차이들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하필 ‘어린 여배우’에게 부치는 편지 형식을 띈 이 글은 한국 아저씨의 전형적인 맨스플레인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경향신문 [고종석의 편지]에마 왓슨 유엔 여성 친선대사께) 그런데 유엔여성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 여성 3분의 1이 육체적, 성적 폭력을 겪었으며, 대부분은 친밀한 파트너에게 당했다. 2012년에는 살해된 여성 2명 중 1명은 배우자나 가족에 의해 숨졌다.” 가정폭력 희생자의 85%는 여성이다.(U.S. Department of Justice, 1995) 여성문제에는 차이를 가로지르는 보편성 역시 존재한다. 이것을 제대로 된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유엔여성기구 Infographic: Violence against women)

또 한편으로 ‘남성교육’은 절실하다. 페미니즘의 성해방은 여성들끼리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의 연합과 연대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일텐데, ‘일반적인 남성’들은 함께 성해방을 준비하기에 일단 너무 무관심하고, 따라서 무식하다. 세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갈등과 대립, 서로에 대한 혐오만을 낳을 뿐이다. 남성을 다 ‘숙청’한 성해방의 공간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면, 남자들과 함께 가는 것은 이 지난한 싸움을 효율적으로 해 나가기 위해 필수적인 일일 터다. 그런 의미에서 유엔의 HeForShe 캠페인은 페미니즘이 남성에게 동지가 되자고 손을 내미는 중요한 한 걸음이다. 엠마 왓슨의 화법은, 그 내용도 훌륭하지만, 무지한 남성 동지들에게 말을 걸기에 매우 적절했다. 10여분의 짧은 연설에서 흑인 페미니즘, 탈식민 페미니즘, 퀴어 페미니즘 등 그 결을 지속적으로 두껍게 해 온 페미니즘의 유구한 역사를 구구절절 늘어놓아야 했을까.(▶Emma Watson: Gender equality is your issue too)

물론 이 진짜 페미니즘 타령에는 “페미니즘에 빠지면 여권 신장이 가장 중요해지고 그 이외의 다른 특징들은 모두 무시된다”며 “보편 철학”을 해야 한다는 무식한 소리가 짝패처럼 붙어다닌다. 2011년, 베스트셀러 작가 강신주가 한 강연에서 한 말이다. 이런 논리 안에서 진짜 페미니즘이란 편협한 부분 운동에 불과해진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이성애자, 비장애인, (유사-백인)남성이 만들어 온 그 ‘편파적인 보편’을 재구성하여 확장시키는 철학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후 그는 “냉장고를 버리”라거나 “설악산, 여신으로 남을 것인가 매춘부로 만들 것인가”와 같은 칼럼을 썼다. 그가 말하는 ‘보편 철학’이라는 것이 실은 성차별에 무감각한 ‘남성 철학’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낸 셈이다.(▶경향신문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설악산, 여신으로 남을 것인가 매춘부로 만들 것인가)

이런 에피소드들은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불신과 그 불신을 밟고서 자꾸만 수면 위로 올라오는 진짜 타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이면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멸시와 혐오, 그리고 무지가 숨어 있다. 그리고 이런 공격은 지금까지 한국 페미니즘의 역사와 그 이론적, 실천적 운동의 성과를 간단하게 지워버리고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만든다. 물론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실 김규항과 김태훈을 하나로 꿰어버릴 수는 없다. 다만 김규항과 같은 비판자들이 ‘외부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맨스플레인을 시전할 때, ‘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내부의 다양한 흐름과 논의를 가려버린 채 하나의 단일한 문제적 흐름, 즉 배척해야 할 반동적이고 이기적이며 부분적인 운동이 되어버린다. 이런 비판들은 한국 페미니즘이 어떤 고민을 해왔는지를 외면하고 다양한 결의 페미니즘 논의들을 ‘백인 부르주아 페미니즘’으로 단순화시킨다.

하지만 이는 무시와 무지의 발로라 할 진짜 타령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점점 심해지는 여성혐오 문화와 노동 시장에서의 여성 차별을 바탕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최근의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도 지금까지 페미니즘이 벼려온 다양한 문제의식들이 간단히 지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일까?

지난 2월부터 SNS에서 화제가 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은 꾸준히 이야기되고 있다.

지난 2월부터 SNS에서 화제가 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은 꾸준히 이야기되고 있다.

패트리샤 아퀘트에 대한 열광과 적녹보라 패러다임 비판

사회적 안전망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파편화된 시대. 각자도생과 생존의 수사만이 힘을 발휘하는 요즘.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위기와 경제적 위기, 그리고 사회적 재난의 상황들 속에서 남성들의 불안이 커지면서 여성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점증하고 있다. 여성들 역시 사회적, 경제적, 물리적으로 생존이 위협당하는 암담한 현실 앞에서 다시 본격적인 ‘생존 투쟁’을 시작했다.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와 포스트-해쉬태그 운동, 그리고 메갈리아의 움직임은 이런 현실의 반영이며, 자연스럽게 성폭력과 더불어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부상 중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올해 초 <보이후드>로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수상한 패트리샤 아퀘트의 수상 소감은 한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그는 “임금에서의 평등”을 주장함으로써 동료들의 박수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 역시 적지 않았다. 임금 격차는 성별뿐만 아니라 인종과 성적지향, 신체적 조건 등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인 여성은 백인 남성에 비해서 78%의 임금을 받지만, 흑인 여성은 64%의 임금을 받으며, 라틴계 여성은 54%를 받는다. 성소수자와 장애인의 노동시장은 언제나 가시밭길이다. 아이를 기르는 동성 커플은 이성 커플에 비해 20%나 적게 번다. 여기에 나이라는 변수까지 함께 생각해 보자. 노동시장에서의 차별을 비롯한 무수한 사회적 차별은 이처럼 다양한 조건들의 중첩과 교차 속에서 이뤄진다. 이것이 차별의 교차성이다. 페미니즘의 역사란 이 교차성을 예민하게 인식해 온 과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퀘트의 수상소감은 일종의 퇴행이었던 셈이다.

영화 <보이후드>로 지난 2월22일(현지시간) 제87회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조연상을 받은 패트리샤 아퀘트가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아퀘느는 이날 “아이를 낳은 모든 여성들, 이 나라에 세금을 내는 모든 시민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 싸워왔다. 이제는 미국에서 임금 평등과 여성들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할 때”라고 말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영화 <보이후드>로 지난 2월22일(현지시간) 제87회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조연상을 받은 패트리샤 아퀘트가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아퀘느는 이날 “아이를 낳은 모든 여성들, 이 나라에 세금을 내는 모든 시민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 싸워왔다. 이제는 미국에서 임금 평등과 여성들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할 때”라고 말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편으로 그는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이들의 평등을 위해 싸워왔다”고 언급함으로써 소수인종 여성과 레즈비언을 비롯한 다양한 여성-소수자들이 페미니즘에 동참해 온 운동의 역사를 간단하게 지워버렸다. 대신 여기에 “아이를 낳은 모든 여성, 세금을 내는 모든 여성들과 시민인 여성들”을 언급함으로써 평등한 임금을 쟁취해야 할 ‘우리’가 누구인지 배타적으로 규정한다. 그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대중에게 전달된 메시지는 분명했다. “평등이란 사회의 지배체제가 인정하는 자격을 갖춘 자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다.”(▶Patricia Arquette’s Feminism: Only for White Women, Slate)

아퀘트의 수상소감이 뜨거운 관심을 끌던 시기. SNS의 다른 한편에서는 페미니즘의 한 흐름으로서 ‘적녹보라 패러다임’을 둘러싼 논란이 진행되고 있었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소년들의 여성혐오… 소년들은 왜 ‘페미니즘이 싫다’고 할까)에서 ‘페미니즘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적녹보라 패러다임’을 언급했던 것이 논란의 시작이었다. 이때 적녹보라 패러다임(이하 적녹보라)이란 노동(적)-환경생태(녹)-성(보라)의 문제를 교차적으로 엮어 세계를 파악하려는 인식의 패러다임을 말한다. 여기에서 노동이라는 문제의식은 자본주의 비판에, 환경생태는 인간중심주의 비판에, 그리고 성은 가부장제 비판에 집중하지만, 사실상 자본주의-인간중심주의-가부장제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이것을 지배의 교차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적녹보라는 이를 인식하면서 기존의 노동운동, 생태운동, 여성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운동의 성격과 구도 자체를 바꾸려는 인식론이다. 적녹보라는 자본주의 따로, 인간중심주의 따로, 가부장제 따로 싸우는 것으로는 이 지배체제들이 생산하는 모순들이 극대화된 신자유주의 시대를 극복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SNS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적녹보라가 여성들의 ‘진짜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고 “남자 비위를 맞추는” 온건한 페미니즘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노동과 생태를 끼얹지 말라고 주장했다.

아퀘트의 수상소감에 대한 열광과 적녹보라에 대한 비판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단순히 성별의 문제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고, 일자리와 임금 문제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임금의 문제가 어떻게 노동의 문제와 분리될 수 있는지, 조금 혼란스러웠다.

[정리뉴스][페미니즘이 뭐길래]11회 ‘진짜 페미니즘’? 다시 논쟁을 시작한다

적녹보라 패러다임으로 보는 세계

일자리와 임금의 문제는 물론 중요하다. 이는 여성들의 ‘진짜 문제’ 중 하나다. 그런데 적녹보라에서 보자면 임금의 문제는 노동의 문제, 즉 자본주의의 문제와 분리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페미니즘에 노동운동을 끼얹지 않으면 임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녀 간 임금격차는 가부장제의 소산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속성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성차별을 그 근간으로 한다. 자본주의 초창기, 자본과 국가는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을 가르고 남성은 생산 영역에 여성은 재생산 영역에 들여놓았다. 그리고 남성의 노동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여성의 노동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하면서 임금지불이 필요없는 ‘사생활’로 만들었다. 가사노동, 돌봄노동, 감정노동, 성노동이 ‘여성의 본능’으로 치부되어 ‘당연히 여성이 하는 일’이 된 것은 이런 과정 속에서였다. 여성의 노동 없이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무시당했고, 본능이 하는 일이므로 대단치 않은 것이 되었다.

마리아 미즈는 이것을 ‘여성의 가정주부화’라고 부른다.(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2014) 그리고 그렇게 생산성이 떨어지는 가정주부(혹은 예비 가정주부)로 생각됐던 탓에 여성은 생산에 참여하더라도 언제나 남성보다 저렴하고 유동적인 노동력으로 취급받았다. 여기에서 아주 당연하다는 듯 여성과 남성 사이의 임금 격차가 탄생하고, 여성의 일과 남성의 일 사이에 위계가 생겨났다. 그렇게 여성은 가장 만만한 노동력이자 국가가 복지로 해결해야 했던 사회적 책임을 대신 해결해주는 일종의 안전장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가사, 돌봄, 성, 감정 노동이 시장으로 들어가 상품이 된 지금에도 그것은 여전히 여성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대부분 비정규직이며, 따라서 임금은 저렴하게 책정되고, 노동조건은 한없이 열악하다.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자본이 이처럼 불합리한 가부장제의 성차별을 받아안은 것은 소수 노동력에 대한 배제와 착취가 자본이 몸집을 불리는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가 자본주의를 망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사회의 운영원리로서 가부장제를 필요로 했다. 미즈가 말하는 것처럼, 여성에 대한 폭력과 배제, 억압은 “단순히 봉건적 ‘잔재’가 아니”다. “이런 폭력은 근대적이고 진보적인 자본주의의 피와 살이다. 자본주의의 심장이다.” 노동이라는 문제틀을 통해 임금노동의 성격 자체에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 한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대한 요구는 달성되기 힘들뿐만 아니라, 남녀 간의 격차가 다소간 해소된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에서 생기는 자본의 ‘손해’는 다른 소수에 대한 착취로 이어질 것이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그 착취는 소수민족 노동자 혹은 외국인 노동자에게로 이동하고 있으며, 그 피라미드의 말단에는 물론 여성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여성들이 임금노동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페미니즘의 유일한 목적일 수 없는 것은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굴종의 삶을 산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질문처럼 “여성들이 취업을 해도 최소임금을 받을 뿐이고 노조는 패배의 조건을 두고 협상을 벌일 능력밖에는 없어보이는 상황”에서 우리가 ‘남성과 같은 노동자’가 된다는 것이 여성 해방과 남녀 평등을 과연 가져올 것인가?(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2013) 우리는 경제 위기가 도래했을 때 얼마나 쉽게 사회가 반동적으로 회귀할 수 있는지, 이미 IMF 때 경험했다. 여성의 노동조건이 개선되기 시작하던 1990년대. 경제난이 닥쳐오자 여성들은 또 다시 가장 먼저 해고되고 비정규직화되면서 일종의 ‘구조조정 총알받이’가 되었다. 그리고 여성의 비정규직화를 막지 못했기 때문에 2015년 우리는 남녀 공히 쓰레기같은 노동력이 된 시대를 산다.

1899년 영국 시인 키플링의 ‘백인의 책무’(The White Man’s Burden)라는 시에서 제목을 빌려 온 그림. 모더니즘의 이항대립적 세계관은 문화>자연, 서구>비서구, 남성>여성, 문명>원시라는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다.  | William H. Walker Cartoon Collection, Princeton University Library

1899년 영국 시인 키플링의 ‘백인의 책무’(The White Man’s Burden)라는 시에서 제목을 빌려 온 그림. 모더니즘의 이항대립적 세계관은 문화>자연, 서구>비서구, 남성>여성, 문명>원시라는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다. | William H. Walker Cartoon Collection, Princeton University Library

하지만 자본이 필요로 했던 것은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한 여성에 대한 수탈만은 아니었다. 1세계를 중심으로 등장했던 자본주의가 필요로 했던 것은 자연과 제 3세계에 대한 식민화와 수탈이었다. 이런 수탈을 가능하게 했던 세계관이란 ‘백인-남성-문명’ vs ‘유색인-여성-자연’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었다. 우리는 여성과 유색인, 제 3세계의 문화들이 끊임없이 ‘자연’으로 등치되는 역사를 살아왔다. 이는 여전히 우리 세계에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며, 지역에 따라 조금씩 그 판본만 달리할 뿐이다. 한국에서는 한민족-남성-문명이 동남아인-여성-자연을 착취한다. 이 인간중심주의에서 인간이란 언제나 (유사)백인 남성일 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대체로 자연으로부터 나오는 자원에 의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가치는 언제나 폄하되고, 인간의 개발을 기다리는 ‘처녀지’로 존재한다. 더불어 인간 외의 다른 종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자원을 제공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그런데 자연과 다른 종을 착취할 때에도 성의 문제가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개공장’(Puppy Mill)의 사례를 떠올려보자. 여기에서 모견은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상품으로서 강아지를 생산하는 출산기계로 전락하여 그 노동에 평생을 바치게 된다. 개공장은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다른 생명을 ‘돌’과 같이 여기는 인간중심주의, 그리고 재생산성에 대한 착취라는 성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징적 공간이다.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해서 대안적인 자급의 지반을 마련하고, 돌봄과 배려처럼 기존에는 여성성이라고 규정되었던 가치를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로 재발견하여 경쟁이 아닌 협력을 추구하며,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나 도구로 대하지 않으면서 인간과 다양한 생명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 자본주의-인간중심주의-가부장제와 대결하기 위해서 나는 우리 삶의 성질 자체를 바꾸는 조금 다른 꿈을 꾸고 있다.

2015년 3월13일 방송된 EBS 하나뿐인 지구 - 강아지 공장을 아시나요?

2015년 3월13일 방송된 EBS 하나뿐인 지구 - 강아지 공장을 아시나요?

진짜, ‘진짜 논쟁’을 시작해야 할 때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노동-환경생태-성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구체적으로 싸워가지 않으면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없다. 그렇다고 적녹보라가 모든 운동의 종합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를 분석하는 틀을 바꿔서 각 운동의 방향을 새롭게 조직하고, 연대를 모색하자는 것이다. 여성학자 고정갑희는 이렇게 말한다. “각자 할 수 있는 운동은 각자가, 함께 해야 하는 운동은 함께.”(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5년 12월5일 “퇴행의 시대: 페미니즘을 급진화 하기” 포럼)

사실 페미니즘은 세계를 바꾸려는 인식론이자 실천적인 운동이기 때문에 ‘진짜 논쟁’이 계속되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이 세계를 조건짓는 지배적인 구조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하고, 그 구조가 만들어 내는 억압과 폭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억압과 폭력 안에서 우리의 삶을 위기에 몰아넣는 모순이 무엇인지 밝혀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무엇과 싸울 것인가”를 결정하고 그리하여 “어떤 세계를 지향해 갈 것인가”를 설정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페미니즘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의 페미니즘들’이라는 설명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이는 페미니즘이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정체성과 삶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현실에 대한 묘사이자 정치적인 선언이며, 다양한 논의들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것이 설명의 끝이어서는 안 된다. ‘진짜 타령’에 더 이상 발목 잡혀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진짜 타령에 “페미니즘 안에 목소리가 얼마나 다양한데”로 응수해 왔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으로는 힘을 가질 수 없다. “내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는 식의 다양성 담론은 페미니즘을 안전하게 만들 뿐이다. 다양성 담론이 논의의 끝이라면, 예컨대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페미니즘도 페미니즘이다”와 같은 말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훨씬 더 치열하게 ‘공동의 목표’를 찾기 위해 토론하고 논의하고 싸워야 한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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