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서울대학교 - 해방정국서 민주화까지 영욕 함께한 ‘한국 지성사의 축소판’

김형규 기자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과 영광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과 다름없다. 일제의 유산부터 극심한 좌우 대립, 미국의 영향력, 군부 독재와 그에 맞선 민주화 투쟁, 그리고 세계를 놀라게 한 오늘의 발전상까지 격동의 세월은 그대로 서울대 70년사 곳곳에 녹아 있다.

1984년 5월 서울대 관악캠퍼스 정문을 사이에 두고 시위에 나선 서울대 학생들과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들이 맞서고 있다.  서울대 제공

1984년 5월 서울대 관악캠퍼스 정문을 사이에 두고 시위에 나선 서울대 학생들과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들이 맞서고 있다. 서울대 제공

서울대의 뿌리는 일제가 세운 경성제국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답이 나올 수도 있다. 여러 학교들이 해방 후 합쳐지며 서울대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서울대는 지금도 단과대마다 시초를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다양하게 주장하는 등 ‘족보’가 제각각이다.

미 군정은 1946년 7월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경성대학의 3개 학부에 서울과 수원 등에 퍼져 있던 일제 시절 9개 관립 전문학교 등을 통폐합해 종합대학교를 만든다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을 발표했다. 학생과 교수들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갈등했다. 반대파는 친일 교수 배격, 미국인 총장 반대 등을 이유로 들었다. 동맹 휴학과 시험 저지, 교직원 사직이 이어졌다. 대학 개편에 따른 이해관계자 갈등으로 시작한 사태는 미 군정에 대한 좌익과 우익의 정치적 투쟁으로 번지며 1948년까지 계속됐다. ‘국대안 파동’은 좌우 갈등으로 점철된 해방 정국의 축소판이었다.

[경향 동갑내기] (5) 서울대학교 - 해방정국서 민주화까지 영욕 함께한 ‘한국 지성사의 축소판’

서울대는 우여곡절 끝에 문리대·법대·의대·공대·농대 등 9개 단과대와 1개 대학원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4년 만에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예술대 교사는 불타 없어졌고, 이공계 실험실과 집기도 대부분 파괴됐다. 서울에 남았던 최규동 총장 등 상당수 교수들은 납북됐고, 피란 가지 못한 학생들은 의용군에 끌려갔다.

서울대는 1951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고려대·연세대·부산대 등과 함께 ‘전시연합대학’의 형태로 강의를 이어갔다. 천막과 창고를 교실로 활용하는 등 처지가 열악했다. 1952년 5월 해체된 전시연합대학은 이후 각 지방 국립대 전신이 됐다.

서울대의 전후 재건사업은 미국 미네소타대학이 주관한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도움이 컸다. 이 프로젝트로 1954년부터 196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약 980만달러를 원조받았다. 특히 교수진 재교육의 성과가 컸다. 인재 양성 계획을 통해 서울대 교수 218명이 미네소타 대학에서 유학을 했다.

1960년대 서울대는 학생들이 독재에 맞서 거리로 나가는 등 민주화 운동의 주도세력이었다.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1960년 4·19혁명부터 시작된 학생들의 사회 참여는 굴욕적인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한 1964년 6·3항쟁 등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이 6·3항쟁의 책임을 물어 서울대 총장을 경질할 정도로 서울대생들은 시위에 앞장섰다. 1970년대의 가장 큰 사건은 관악캠퍼스로의 이전이다. 초기 서울대는 대학본부와 문리대·법대는 동숭동에, 상대는 종암동에, 사범대와 공대는 각각 용두동, 공릉동에 자리 잡는 등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지리적 분산은 서울대를 종합대학교가 아닌 연립대학으로 만든다는 비판이 많았다. 정부는 1970년 새 캠퍼스의 통합 이전 부지로 서울 근교 관악산 서북지역 330만㎡(100만평)를 정해 발표했다. 1975년 3월 이전한 관악캠퍼스에서 첫 입학식이 열렸다.

1980년대 초반 실시된 졸업정원제 영향으로 서울대는 학생이 크게 늘며 강의실과 식당, 도서관이 초만원을 이뤘다. 서울대는 이 시기 대학원 중심 대학으로 개혁을 실시하고 수많은 연구소를 증설했다. 학내에는 수시로 경찰이 진입해 반정부 활동을 감시했지만, 학생들은 1987년 6월항쟁의 주역이 되며 사회 민주화의 초석을 놓았다.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을 받아 숨진 사건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1990년대에는 학부제 도입과 외환위기 등 학생들의 생활 전반을 뒤흔든 사건들이 많았다. 연구 중심 대학으로의 중장기 발전안도 나왔다.

서울대는 2000년대 들어 인사 및 재정의 자율권을 부여한다는 취지로 법인화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대학 자율성과 재정 안정성을 해친다는 학내외 반대가 있었지만 서울대는 2011년 말 법인화 절차를 완료했다.

식민지 폐허 위에서 시작한 서울대는 70년 만에 16개 단과대, 12개 대학원을 갖춘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대학으로 성장했다. 현재 서울대 재학생은 학부생 2만명, 대학원생(석·박사 과정) 1만3000명이 넘는다. 전임교수도 2100여명에 이른다. 양적 성장 못지않게 그간의 학문적 업적으로 사회적 평판과 세계적 지명도 등 질적 성장도 이뤄냈다. 서울대는 지난해 영국의 대학평가기관 QS의 세계대학평가에서 36위를 차지했다.

■‘1호’ 변호사·판사·법무부 장관 …법조계 ‘여풍’의 발원지

서울대학교에서 여성들이 남긴 발자취는 ‘한국 최초’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의 고등교육 기회가 많지 않던 시절이고, 서울대에서 배우고 가르친 이들이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윤석

황윤석


해방 후 1946년 개교 당시 서울대에는 여학생이 꽤 있었다. 경성여자사범학교 등 여러 학교가 합쳐져 서울대로 거듭나며 기존 여학생들이 서울대생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표적 사립 명문인 프린스턴대가 1969년에서야 여성의 입학을 허용한 것과 비교하면 이른 시기로 볼 수 있다.당시 서울대 여대생에 대한 시선에는 가부장적 요소가 강했다. 1960년대 서울대 학보인 ‘대학신문’ 기사를 보면 사범대 소속 생활관을 소개하며 “알뜰주부를 길러내고 있다”고 표현했다. 또한 여학생들의 학군단 위문공연 소식을 전하는 등 지금과는 사뭇 다른 여학생의 이미지도 엿보인다.

이태영

이태영


최초의 서울대 여학생 중에서는 1946년 법대에 입학한 고 이태영 박사가 유명하다. 이 박사는 졸업 후 1951년 실시된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여성 최초로 합격했다. 이 박사는 판사를 지원했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야당 정치인 고 정일형 박사의 아내라는 이유로 법관 임용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이 박사는 대한민국 1호 여성 변호사가 됐다.

강금실

강금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여학생들은 법조계 최초 기록을 독식했다. 195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황윤석씨는 1954년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며 최초 여성 판사 기록을 세웠다. 1979년 졸업한 조배숙씨는 1982년 서울지검 검사로 임용되며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검찰에 최초로 입문했다. 그는 이후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조 의원과 경기여고·서울대 법대 동창인 김영란 전 대법관과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도 법조계 여성 최초 기록을 갖고 있다. 김 전 대법관은 2004년 여성 최초 대법관이 됐다. 강 전 장관은 2003년 여성 최초 법무부 장관이 됐다.

여학생에 비해 여교수의 등장은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다. 서울대 공대는 1973년 최초의 여성 교수로 박순자씨를 채용했다. 법대는 2003년에서야 양현아씨를 법여성학 담당 교수로 임용하며 첫 여성 교수를 배출했다. 2004년에는 김현진씨가 만 29세의 나이에 공대 기계항공공학부 조교수로 임용되며 서울대 최연소 교수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9월 기준 서울대 전임교수 2100명 가운데 여성은 306명이다. 비율로는 14.5%에 그친다. 10년 전의 10.5%와 비교하면 크게 늘었지만 전체적으로 여교수 비중이 작은 편이다. 다만 신규 임용 교수 가운데 여교수 비율은 2006년 13.8%, 2010년 20.4% 등 증가하고 있다.

여학생 비중은 꾸준히 커지는 추세다. 1976년 서울대 신입생 2611명 가운데 여학생은 355명으로 13.6%에 불과했지만, 40년이 지난 올해 서울대 수시와 정시 합격자를 합산한 여학생 비율은 41.1%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여학생 증가는 2004년 최초의 여성 총학생회장 탄생 같은 변화도 가져왔다. 2012년에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합격자 중 여학생 수가 절반을 넘어 화제가 됐다.

여성 총장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풀어야 할 과제로 꼽힌다. 서울대 여교수가 그동안 맡은 가장 높은 보직은 2010년 박명진 언론정보학과 교수가 최초로 여성 부총장에 취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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