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회 종전선언이 뭐길래

이대근 논설주간

■ 태도를 바꾼 북한과 미국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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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가 주창하고 문재인 정부가 계승한 한반도 종전선언에 대한 북한과 미국의 당초 반응은 뜨뜻미지근한 것이었다. 종전선언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다.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도 문 대통령의 설득에 동의했을 뿐이다. 트럼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종전선언은 비핵화-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거처야 할 필수 과정으로 굳어졌다. 그 때문에 북한, 미국 모두 더 이상 종전선언을 소 닭 보듯 할 수 없게 되었다.

트럼프의 태도가 바뀌었다

트럼프는 남북정상회담을 앞 둔 4월 17일 아베 신조 일본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북한과 만나서 종전을 논의할 예정입니다. 저는 잘 되기를 바랍니다.” 트럼프가 종전선언이 평화협정 이전 단계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발언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종전선언에 적극적이었다. 종전선언이 북핵 문제 해결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이 끝나고 북미정상회담을 앞둔 6월 1일 트럼프가 백악관에서 북한의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만났을 때도 종전선언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그럴(종전선언) 수도 있지요. 우리는 그것에 관해 이야기 했습니다.…그리고 서류에 서명하는 것 보다는 더 한, 무엇인가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약 70년 된 한국 전쟁을 종전시키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이전에 이것에 대해 논의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번 회담에서 나올 수 있는 뭔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6월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두 정상이 판문점 선언(종전선언)을 존중한다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7월 7일 북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 따르면, “(종전선언은) 조미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더 열의를 보이였던 문제”였다. 트럼프는 회담을 마치고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이제 곧 전쟁이 끝난다는 희망이 보이며, 곧 끝날 것이다” “오늘의 분쟁이 내일의 전쟁이 될 필요는 없으며 역사가 보여준 것처럼 적대적이었던 사람들도 우정을 나눌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6월 14일 싱가포르 회담 직후 귀국하자마자 올린 트위터에서는 더 나아갔다. “더 이상 북한으로부터의 핵 위협은 없다”며 마치 종전 선언의 조건이 충족된 듯한 언급을 했다. 6월 15일 주례 연설에서도 “지금 전 세계 사람들은 내가 대통령이 되기 전 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고 밝혔다.

소극적으로 변한 트럼프

그러나 일주일 뒤인 6월 22일 대북 제재 1년 연장하며 발표한 성명에서 트럼프는 다른 말을 했다. “한반도 내 사용 가능한 핵무기의 존재 및 북한정부의 행동과 정책은 미국의 안보, 외교, 경제 등에 대한 비정상적이고 특별한 위협을 계속해서 제기하고 있다.” ‘북 위협 없다’에서 ‘북 위협 크다’는 정반대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 때문에 7월 15일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은 트럼프의 북 위협 부재 발언이 “북한의 비핵화 약속 준수를 전제한 것”이라고 해명해야 했다. 북한의 위협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종전선언은 불가능하다. 이런 인식 때문인지 이후 트럼프와 미국 정부는 종전선언에 소극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리고 종전선언을 하려면 먼저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해야 한다고 강력한 조건을 제시했다.

적극적으로 변한 김정은

트럼프만 변한 게 아니다. 김정은도 변했다. 김정일 때부터 남측 주도의 종전선언 방안에 수동적이었던 북한은 판문점 선언에 종전 선언이 명시되었음에도 별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북미정상회담 때도 마찬가지였다. 트럼프가 종전선언을 강조하면 김정은은 듣는 입장이었다. 북한 매체도 종전선언을 강조한 바가 없다. 그러던 북한이 7월 6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3차 방북을 계기로 미국이 왜 종전선언을 하지 않느냐고 강력하게 따졌다.

“조선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하고 공고한 평화보장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첫 공정인 동시에 조미사이의 신뢰조성을 위한 선차적인 요소이며, 근 70년간 지속 되여 온 조선반도의 전쟁상태를 종결짓는 력사적 과제로서 북남사이의 판문점 선언에도 명시된 문제이고, 조미수뇌회담에서도 트럼프대통령이 더 열의를 보이였던 문제이다.” (7월 7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

한국정부는 반색했다.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오니 종전선언에 추진력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동신문은 8월 18일 논평을 통해서는 “한 갓 정치적 선언에 불과한 종전선언 마저 채택 못하게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또 노동신문 8월21일자는 ”종전선언의 채택은 조미 사이의 신뢰조성과 관계개선은 물론 조선반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전보장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고 재차 강조했다. 미국이 종전선언에 적극적일 때는 소극적이던 북한이, 미국이 소극적 태도로 변하자 종전선언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 북미간 종전선언 시소게임- 왜 엇갈렸나?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연합뉴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연합뉴스

전환점- 폼페이오 3차 방북

종전선언에 관한 북미간 태도가 극명하게 엇갈린 시점은 7월 6일 폼페이오 3차 방북이다. 종전선언과 비핵화 교환 협상을 본격화하면서 상대의 입장이 좀 더 분명히 드러났다. 북한은 종전선언 이행을 주요 의제로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합의한 종전선언 문제까지 이러저러한 조건과 구실을 대면서 멀리 뒤로 미루어 놓으려는 립장을 취하였다(외무성 대변인 담화).” 대신 미국은 “CVID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 나왔다”고 북한이 비판했다. 미국은 정전협정 65주년인 7월 27일 종전선언을 하자는 북한의 제안을 거부하고. 선 비핵화 조치로 핵 신고와 검증을 요구했으며 그 때문에 협상은 진전을 보지 못했다.

미국이 종전선언에 소극적이라는 사실은 북한이 미국을 압박할 명분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래서 북한은 미국을 몰아붙여 미국의 체제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불가역적 비핵화로 가는 상황을 피하려 한 것 같다. 미국은 종전선언에 집착하는 북한의 태도를 약점 삼아 불가역적 비핵화 조치를 이끌어내려 북한을 압박했던 것 같다. 협상이 본격화하면서 북한은 종전선언을, 미국은 종전선언의 조건을 내세워 상대의 양보를 이끌어내느라 기존 태도를 바꾼 것으로 관측된다.

다른 요인도 있다. 북미 모두 종전선언이 무엇인지 여전히 판단이 다르다. 종전선언을 왜, 어떤 조건에서 하며 그 효과는 무엇인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종전선언은, 어떻게 접근하고 협상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 가변적인 성격의 것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조건에서는 북미 모두 종전선언이 유리한 카드인지 불리한 카드인지 분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상황 변화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내 종전선언 비판론의 내용과 한계

트럼프가 초기 종전선언에 기대를 걸었던 것과 달리 미국내 전문가와 언론은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게다가 비핵화도 별 진전이 없자 악화된 여론을 의식해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미국내 비판론은 종전선언에 대한 미국식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는 트럼프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 다른 것을 알고 있겠지만, 미국 전문가 집단은 여전히 구별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중대 조치를 하지도 않았는데 왜 평화체제로 가느냐는 비판론도 그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종전선언을, 정전체제를 끝내고 평화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의사 표시로 간주한 결과이다.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 대사조차 종전선언을 불가역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인식 수준이라면, 당연히 중대한 비핵화 조치는 필수적인 것이 되고, 그게 없으면 종전선언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미국으로서는 느긋하던 북한이 갑자기 종전선언을 시급하게 요구하는 태도를 의심할 수 있다. 종전선언을 빌미로 북한이 유엔사 해체, 한미연합훈련 완전 중단,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할 명분을 갖고 미국을 압박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특히 북한이 시진핑의 조언에 따라 움직이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있다. 뭔가를 노리고 있는 것 같은 북한을 위해 종전선언이라는 선물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종전선언의 딜레마

북한은 7월 7일 종전 선언의 필요성을 강조하느라 ‘평화 보장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첫 공정’ ‘전쟁상태를 종결짓는 력사적 과제’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만일 종전선언이 이같이 중대한 진전이라면, 북한은 그에 상응하는 비핵화 조치를 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핵 신고, 폐기 요구를 반박했다. 모순적인 태도이다. 그렇다면 정전선언의 가치를 낮출 필요가 있다. 노동신문이 8월 18일 개인 논평을 통해 ‘한 갓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그때문일지 모른다.

종전선언이 이런 의미라면 북한이 중대한 비핵화 조치를 취할 이유는 없다. 대신 종전선언을 계기로 비핵화 및 북미관계가 별로 진전되지 못하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핵 신고와 같은 중대한 비핵화 조치를 조건으로 요구하면, 선언 내용에나, 후속 조치에서 그에 타당한 북한 체제 보장을 제공해야 한다. 그럴 생각이 없으면, 요구 조건을 낮춰야 하고, 그러면 미국내 여론은 나빠질 것이다.

■ 종전선언의 탄생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발단은 부시의 발언

종전선언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작품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2006년 11월 18일 하노이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부시가 말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동안 북한 비핵화 하나에 초점을 맞췄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북핵 문제를 발생시킨 근원인 한반도 평화의 부재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한반도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포괄적 접근법으로 전환하겠다는 뜻이었다. 즉, 한반도 전쟁 상황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맺어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물론 평화협정 전에 북한은 비핵화를 완료해야 한다.

그러나 이 때 부시가 말한 종전, 즉 전쟁을 끝내는 것은 평화협정과 분리된 게 아니었다. 평화협정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당사자간 맺는 국제조약이다. 종전은 당연히 평화협정의 일부에 해당한다. 부시의 종전선언이라는 말이 눈에 띠기는 했지만, 종전선언을 하고 동시에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는 점에서 두 개는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의 묶음이었다. 무엇보다 부시 자신이 종전선언을 독립된 절차로 인식하지 않았다.

평화협정에서 종전선언을 분리한 한국

부시의 종전선언을 독립된 절차로 발전시킨 쪽은 한국이었다. 당시 한국은 비핵화 완성 때 북한 체제를 보장하는 방식에 보완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북핵 불능화에서 완전한 비핵화까지 과도기가 불가피하지만 이 기간에는 북한 체제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은 과도기에 북한 체제 안전 담보를 해주면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온 방안이 부시의 발언을 적극 활용해 비핵화가 진행되는 동안 잠정적 대북 안전 보장 조치로 당사자간 종전선언을 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평화협정과 분리된 독립 의제로 종전선언을 제안하기로 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2007년 9월 7일 시드니 북미정상회담에서 노대통령이 종전선언을 부각하려 노력한 것도 그 때문이다. 회담에서 부시는 다시 종전선언을 거론했다. “한국 전쟁을 종결해야 합니다. 김정일과 평화협정 체결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먼저 검증 가능하게 핵 프로그램을 폐기해야 합니다.”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도 부시는 “(노대통령과 함께 한반도에서) 전쟁을 끝내는 문제(종전선언)”를 논의했다면서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평화조약에 서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미국측 아랑통역이 부시의 발언을 한국말로 제대로 통역하지 못했다. 통역은 종전선언이라는 말을 아예 빠뜨렸다. 종전선언을 듣지 못한 노대통령이 부시에게 “한반도 평화체제 내지 종전선언 말씀을 빠뜨리신 것 같다”면서 다시 말해줄 것을 요청했다. 부시가 응했다.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안 하고는 김정일에게 달렸다고 얘기한 것입니다.(통역)” 이에 노 대통령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 또 요청했다. “똑같은 이야기이긴 한데, 김정일 위원장이나 우리 국민들이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다시 부시의 대답. “더 이상 어떻게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전쟁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증가능하게 핵 폐기해야 합니다.(통역)”

나중에 통역 문제 때문인 것으로 해명됐는데도 당시 국무장관으로 배석했던 콘돌리자 라이스는 회고록 <최고의 영예>에서 노 대통령을 이상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노 대통령은 심중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 이듬해에는 노 대통령의 이상한 성격이 드러난 사건이 또 한번 있었다. …(다시 말해달라는 노 대통령의 요청에) 부시 대통령은 약간 놀란 기색이었지만 친절하게 한 번 더 말해주었다. 노 대통령은 ‘의도를 좀 더 명확히 밝혀주시면 좋을 텐데요’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황당한 표정이었다.… 노 대통령은 자기가 얼마나 기가 막힌 상황을 벌였는지 모르는 눈치였다.”(692-693쪽) 역시 같은 자리에 배석했던 송민순 외교부 장관은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알아들으니 미측 통역이 실수한 줄 알았지만, 한국말을 모르는 라이스는 노 대통령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노 대통령이 무례한 행동을 한 것으로 믿었다.

종전선언 의미를 몰랐던 부시

남북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먼저 부시의 종전선언 확인이 필요했던 노대통령은 결국 남북정상 회담 결과를 담은 10.4 남북 공동 선언에 다음과 같이 정전 선언 추진을 반영할 수 있었다.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종전선언을 중요시했던 것과 달리 종전선언이라는 말을 처음 꺼냈던 부시나 미국 정부는 종전선언을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부시나 미국 정부는 한국이 종전선언을 거론할 때 마다 처음 듣는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부시나 미국 정부는 종전선언을 평화협정의 일부로 간주했고, 그 때문에 종전선언을 평화협정 체결 이전의 독립된 절차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부시는 안전보장 협정, 평화협정, 종전선언, 전쟁 종식등의 용어를 특별한 개념 구분 없이 혼용했다. (송민순, <빙하는 움직인다>)

종전선언-평화협정 2단계론의 완성

이 때만 해도 노무현 정부가 생각한 종전선언은 별도 의제이기는 하지만, 평화협정과 완전히 분리시킨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행위는 곧 평화 체제 협상을 시작한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종전 선언은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의 출발점이었다. 10.4 선언의 문장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종전선언을 하는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간 4.27 판문점 선언은 그와 다르다. “남과 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종전선언이 먼저이고 평화체제 구축이 그 다음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10.4 선언과 순서가 거꾸로다. 평화체제와 독립된 의제임을 더욱 분명히 한 것이다.

물론 종전선언에 이어 평화체제 구축 노력을 하는 순서는 판문점 선언에서도 변함이 없지만, 종전선언이 자동적으로 평화체제 협상의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잠시, 이 문장에 대해서는 한마디 지적할 것이 있다. 남과 북이 종전 선언의 주체인 것처럼 읽혀지기도 하고, 올해라는 시점이 종전선언에 걸리는 건지 평화체제 구축에 걸리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종전선언, 평화체제구축의 주체가 모두 ‘3자, 또는 4자’라는 것인지, 아니면 둘 중 어느 하나는 3자이고 다른 것은 4자라는 것인지도 명료하지 않다. 남북이 공동 작성한 최고의 비문이자 악문이 아닐 수 없다.

■ 북미 협상은 왜 종전선언에 앞에서 멈췄나?

장도리

장도리

종전선언에 관한 공동인식이 없다

북미가 종전선언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다면, 북미 양 당사자가 아니라, 혹시 종전선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종전선언은 무엇인가?

문대통령은 7월 12일 싱가포르 스트레이츠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종전선언을 이렇게 설명했다. “상호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관계로 나가겠다는 공동의 의지를 표명하는 정치적 선언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습니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협정체결 등 항구적 평화 정착 과정을 견인할 이정표가 되는 셈입니다.” 첫 문장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지적 선언, 즉 정치 지도자의 의지표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선언에 필요한 조건은 제시되지 않았다. 북미가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선언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 두 번 째 문장은 선언의 목적이 비핵화 견인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임성남 외교부 차관도 6월 18일 P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종전선언이 상호간 신뢰를 증진하여 평화 체제를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 의지의 표현으로, 북한의 비핵화 이행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체제 구축을 촉진하는 조치로서 유용할 것이라고 본다.” 선언은 비핵화 이행을 촉진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정리하면, 비핵화 완료까지 기다렸다가 북한 체제 보장을 하면 비핵화 과정에는 북한 체제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점을 고려, 미국이 잠정적 안전 보장을 제공해줌으로써 북한이 비핵화를 이행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단계에서 종전선언을 해야 할지에 관한 명시적인 합의가 없다는 점이다. 현재 북한이 취한 조치로 충분한지,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훨씬 더 진전된 비핵화 조치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둘 사이 중간 정도인지 객관적 기준이 없는 것이다.

핵신고- 종전선언은 부등가 교환

물론 종전선언이 비핵화를 견인 및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으므로, 비핵화가 상당히 진전되어야 한다는 미국의 요구 조건은 지나친 것이다. 아무런 보상 없는 무장해제를 의미하는 비핵화를 스스로 이행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게 가능한 일이었다면, 북한 체제 보장을 위한 종전선언이라는 구상은 당초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핵화 초기 혹은 비핵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상황에 종전선언을 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역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북미가 한국의 종전선언 조건을 따라야 한다는 법도 없다. 북미가 타협 가능한 조건에 합의하면 그것이 바로 종전선언 조건이 된다. 하지만 북미가 각자 다른 기준과 조건을 고수하면 방법이 없다.

낮은 수준의 종전선언, 높은 수준의 종전선언

북미가 종전선언을 낮은 수준에서 할지, 높은 수준에서 할지 의견 일치가 필요하다. 미구근 북한에 높은 수준의 비핵화를 요구하면서 자신은 낮은 수준의 대북안정 보장을 제공하겠다면 타협은 어렵다. 마찬가지로, 북한은 미국에 높은 수준의 안전 보장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비핵화 조치는 낮은 수준에 그치겠다면 역시 합의가 불가능하다. 북미가 낮은 수준에서 합의할지, 높은 수준에서 주고받을지 등가의 원칙에 동의해야 한다.

낮은 수준의 종전선언을 하겠다면, 어떤 의미에서 트럼프가 이미 제시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발언을 뒤집기는 했지만 트럼프는 북한 위협이 사라지고 전쟁 위협이 더 이상 없다고 선언한 바 있다. 종전선언을 이 수준에서 하기로 했다면 북한은 그에 맞게 제한된 비핵화 조치를 취하면 될 것이다.

종전선언-비핵화는 등가 교환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종전선언 전에 북한이 핵물질 핵무기, 핵관련 시설을 신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것은 높은 수준의 종전선언을 원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핵 신고는 비핵화가 결정적 전환점에 이른 상태, 혹은 북미간 신뢰가 높은 상황에서나 가능한 조치이다. 북한의 가장 중요한 안보 사항을 미국에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북한이 신고 때 일부를 속일 경우를 상정해 보자. 미국이 갖고 있는 정보와 차이가 있다고 북한 신고 내용을 의심하며 검증을 주장하면 핵협상은 파탄날 수 있다. 북한이 성실 신고를 해도 마찬가지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북한을 믿지 못하는 미국이 스스로 확보한 정보에 근거해서 북한이 일부 은폐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파국이 온다.

한마디로, 핵 신고는 비핵화의 진전이 아니라, 자칫 제3차 북핵 위기로 피달을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그런데 북미간 신뢰가 굳건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 북한에게 신고하라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신고는 북미간 상호 신뢰가 축적되어 ‘감추고 찾는 숨바꼭질’을 할 필요가 없는 믿음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갈등의 여지를 없앨 수 있다.

또한 핵 신고의 대가로 미국이 단순히 종전 선언하는 것으로는 결코 북한을 만족시킬 수 없다. 신고의 수준에 상응하는 높은 수준의 북한 체제 보장책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미국이 요구하는 신고-선언 방안은 등가교환이 아니다. 종전선언 조건에 관한 북미간 불일치를 고려하면 일부 핵 폐기 혹은 일부 신고를 종전선언과 맞교환하는 것이 적당해 보인다.

■ 종전선언 고개를 넘으려면

종전 선언을 비핵화 견인 수단으로 삼아야

종전선언의 취지는 북한의 비핵화를 견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를 진전시켜야 종전선언을 해주겠다며 선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게 바로 비핵화가 교착 국면에 처하게 된 이유이다. 종전선언은 비핵화 조치를 강제하는 압박 수단이 아니라, 비핵화를 유도하는 안내자, 견인 수단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종전 선언에도 정전협정은 유지를

미국내에서는 종전선언하면 정전체제가 무력화되는 것 아니냐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종전선언하면 북한이 유엔사해체, 미군철수, 한미연합훈련 완전 중단의 압박을 가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는 완전한 오해이다. 남북 모두 동의하듯이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이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지도자간 신사협정이다. 북한의 무리한 요구가 걱정이 되면, 정전협정은 평화협정에 의해서만 대체된다고 분명히 못 박으면 된다.

또한 완전 비핵화 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북 군사적 옵션을 제거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기우에 불과하다. 북한이 비핵화를 하지 않거나, 위협을 재개하면 신사협정이 깨지는 것이므로 종전선언은 자동 무효가 되면서 대북 군사적 옵션도 살아난다.

김정은의 비핵화 결단 인정을

미국인들은 대북 제재와 압박이 김정은이 대화로 선회한 가장 결정적 요인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김정은이 비핵화 결단을 내리는데 영향을 미친 하나의 요인에 불과하다. 비핵화는 김정은이 국가 발전 전략을 스스로 수정하면서 내린 결단이지 미국의 압박 때문이 아니다. 압박 때문이라면 김정일 시대에 이미 핵을 포기 했어야 한다.

그동안 미국이 북한에 제공한 선의의 조치는 모두 즉각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그동안 취한 비핵화 조치는 되돌리는데 일정한 비용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지금까지는 북미간에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이 김정은을 불신한 결과이다. 그러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김정은은 비굴하게 비춰지더라도 협상의 단절로 이어질 행동은 극구 피했다. 만일 김정은이 비핵화 결단을 하지 않았다면, 북핵 교착 국면에도 불구하고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 북미가 종전선언 앞에서 멈춘 이유

지금까지 북핵 문제에 관해 비관적인 측면을 부각했지만, 달리 생각하면 긍정적 측면도 있다. 북미간 종전선언 문제로 교착 상황에 처했다는 것은 북핵 문제의 핵심에 접근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북미가 선언-신고 문제로 갈등한다는 것은 북핵 해결의 관건인 비핵화와 체제 보장 교환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다. 과거 북핵 1차 위기, 2차 위기 때 이렇게 본질 혹은 핵심에 다가간 적은 없었다.

이대근 논설주간

이대근 논설주간

만약, 이 고갯길을 잘 넘는다면 다음 고개가 수월해질 것이다. 이번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북미가 초기 단계에 북핵 문제 해결의 모델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델은 비핵화-북한 체제 보장의 로드맵의 기초가 될 수도 있다. 지금 잠깐 멈춤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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