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군주가 시대착오에 빠진 나라는 멸망한다, 준가르가 그랬듯이

공원국 | 역사인류학자

몽골 유목 국가의 최후

청에 쫓기는 준가르 건융어필평정서역전도(乾隆御筆平定西域戰圖) 중 청나라군이 준가르를 급습하는 장면(1753년). 준가르는 외부의 힘이 아니라 시대착오적 망상에 빠진 한 인간에 의해 자멸했다.

청에 쫓기는 준가르 건융어필평정서역전도(乾隆御筆平定西域戰圖) 중 청나라군이 준가르를 급습하는 장면(1753년). 준가르는 외부의 힘이 아니라 시대착오적 망상에 빠진 한 인간에 의해 자멸했다.

초원에서든 전답에서든 인간사의 법칙은 한 가지, 사람이 모이면 흥하고 흩어지면 망한다. 마찬가지로 사람 또한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서로 ‘베푸는 것(德)’이 있는 곳으로 모인다. 그래서 껍데기 같은 명분도 세대를 단위로 보면 실체가 있고, 완벽해 보이는 승리도 더 처절한 패배의 씨앗에 불과할 수 있다.

몽골 제국 붕괴 후, 16세기 이래 세계사의 흐름은 분명 민족국가로 기울고 있었다. 유럽에서 베스트팔렌 조약과 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이런 경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징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확실한 이란 민족왕조였고 중앙아시아는 수니파 정주 튀르크의 국가가 되어 갔다. 17세기 러시아가 시베리아 전체를 차지해 제국으로 도약하는 격변이 일어났지만, 그들의 동방 진출은 ‘타타르(몽골)의 굴레’를 벗어나 정교회에 기반한 슬라브인의 민족국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만주(滿洲)족은 거의 유일하게 세계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극소수 이민족이 다수를 통치하는 정복 제국의 전통을 부활시켰다. 초원과 정주세계로부터 동시에 야만인 취급을 받던 만주인은 조상 여진인과 마찬가지로 이종결합형 집단이었다. 사냥·목축, 어렵·채집, 농경, 무역, 약탈까지 그들은 제한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다 했다. 이동식 방목은 하지 않았지만 훌륭한 말을 가지고 있었고, 정착 생활을 했지만 부족 단위로 살았다. 사방에서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았기에 그들은 지배자가 되는 것이 극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홍타이지(청태종)는 엉뚱하게도 <서경>을 인용하며 입버릇처럼 “하늘은 사사로이 아끼는 이가 없고, 오직 덕 있는 이를 돕는다(皇天無親, 惟德是輔)”고 했는데, 이런 조심스러운 태도야말로 그의 후손들이 중국 땅에서는 칭기즈칸의 후손들보다 두 배 이상 오래 버틴 이유였을 것이다.

중국에서 밀려난 몽골은 여전히 제국의 관성을 따랐지만, 만주라는 변수 앞에서 좌충우돌하다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

■ 몽골고원의 통합과 분열

대칸 울루스(원나라) 붕괴 후 몽골은 장성 북쪽으로 쫓겨났지만, 영락제는 그들이 칭기즈칸 혈통을 구실로 제국을 부활시킬 것이 두려워 쉴 새 없이 원정을 감행했다(1414년부터 1424년 사이 네 차례). 이때 영락제가 우군으로 활용한 세력이 서몽골 오이라트였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안 있어 몽골의 실권을 장악한 후 오히려 명을 위협했다. 토목보에서 명나라 황제가 오이라트 수장 에센에게 사로잡힌 일(1449년)로 초원과 중국의 세력 관계가 다시 역전되는 듯했다. 그러나 오이라트는 군사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칭기즈칸 가문의 권위를 넘을 자산이 없었다. 에센 공식 칭호는 ‘타이시(太子)’였고, 스스로 칸을 칭하는 바로 그 순간 살해당했다.

에센이 죽자 칭기즈칸 가문은 순식간에 오이라트를 알타이로 밀어내고 몽골을 재통합했는데, 주인공은 대원(大元·몽골음 ‘다얀’)의 적통을 자부하는 차하르부의 다얀칸(?~1524)이었다. 그는 몽골을 6만호 체제로 재편하고, 제국의 관례를 따라 아들들을 수령으로 보내 통치하게 했다. 하지만 중앙집권적 국가와 친자분봉 체제는 팽창해 나갈 때나 외부에 거대한 부의 원천이 있을 때 양립할 수 있지만, 강역이 줄어들고 자원이 한정된 상황에서는 지탱되기 어렵다. 대를 거듭할수록 세습으로 목지는 점점 더 작은 단위로 쪼개지니 집단끼리 자원을 두고 싸우게 되고, 이 판을 벗어나 외부로 영역 확장을 시도한 이들은 중앙의 통치권 밖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방에서 투메트부의 알탄칸이 산서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고(1542년) 북경 포위전을 벌일 때도(1550년), 북방의 할하는 오이라트를 밀어내면서 점점 독립의 길을 가는 중이었다. 알탄칸은 명을 상대로 거의 매년 약탈전을 벌였지만 1570년 아들의 망명으로 위세가 꺾이고, 이어 명으로부터 순의왕(順義王)이라는 칭호를 받음으로써 대몽골 울루스의 칸이 아닌 한 부족의 수령으로 전락했다. 결국 약탈로 인해 얻은 재물은 몽골의 통합이나 확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한편 명의 군대는 야전에서는 허약했지만 대포의 힘으로 성채를 지키는 데는 탁월해서, 이미 기병으로는 거점을 점령할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100여년이 흐르고 몽골과 명의 사이에 만주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자 몽골의 분열은 가속화된다.

<b>‘어부지리’로 산해관 넘은 만주</b> 난공불락 요새로 불리던 산해관 용두의 모습. 만주는 때맞춰 일어난 이자성의 난을 틈타 피 흘리지 않고 산해관을 넘을 수 있었다.

‘어부지리’로 산해관 넘은 만주 난공불락 요새로 불리던 산해관 용두의 모습. 만주는 때맞춰 일어난 이자성의 난을 틈타 피 흘리지 않고 산해관을 넘을 수 있었다.

■ 만주의 등장과 칭기즈칸 권위의 종말

겉으로 명에 충성을 바치면서도 어느덧 건주여진(建州女眞)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1589년 만주라는 새로운 족명을 내세우고 칸이 되었다. 1593년 만주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동몽골과 누르하치에게 복속되지 않은 해서(海西)여진이 힘을 합쳐 만주를 공격했지만, 명을 대신하여 수많은 전투를 수행한 이 노련한 군인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 기막힌 우연으로 삼자의 운명을 바꾼 조일전쟁(임진왜란)이 터졌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참전한 틈타
여진을 통합한 누르하치의 만주
다시 ‘이자성의 난’ 일어난 사이에
낙공불락 산해관 넘어 명나라 접수

명이 참전으로 남은 힘을 소진할 때 만주는 여진 통합을 완수했다. 이제 명은 몽골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여진)를 이용했던 것처럼 이제 만주를 견제하기 위해 몽골을 이용했지만, 만주는 몽골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1619년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에서 명-조선-예허여진 연합군을 대파하고, 몇 개월 후 다시 할하-호르친-자루드 몽골 연합군을 꺾었다. 이 일로 동몽골은 만주에 기우는 쪽과 차하르의 칸에 남는 쪽으로 나뉜다. 분열은 깊어서, 1626년 만주의 누르하치가 영원성에서 명군에 패했을 때도, 할하는 차하르를 지원하여 만주에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하르에 병탄되는 것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급해진 차하르의 릭단칸은 먼저 호르친을 통합하기 위한 전쟁에 나서지만, 호르친은 오히려 만주의 홍타이지에게 확고하게 붙어버렸다. 홍타이지의 부인들은 모두 호르친 출신이었고, 그들은 만주가 일어나고 있음을 읽고 있었다. 1632년 홍타이지는 복속해온 몽골 부족들과 연합하여 릭단칸을 완파함으로써 동몽골의 판세를 결정지었다. 몽골인 사강세첸이 1662년 완성한 <몽골 원류(에르데니-인 톱치)>에도 홍타이지가 릭단칸을 물리치면서 칭기즈칸의 권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기술한다. 그가 칸을 참칭한 오이라트에게 퍼부었던 저주에 비하면 획기적인 태도의 변화다. 이렇게 칭기즈칸 가문의 권위는 사실상 사라졌다. 이후로 동몽골은 청의 편에서 명을 치는 싸움에 동원된다.

만주는 일전에 조일전쟁의 덕을 봤듯이, 이자성(李自成)의 농민 반란군이 북경을 점령하는 기막힌 우연의 힘으로 난공불락의 산해관을 피 흘리지 않고 넘었다. 관을 넘은 만주군은 명나라 관군 역할을 하며 땅을 접수해나갔다. 만주가 중국을 완전히 차지했을 때(이제 ‘청’이라 부르자), 몽골은 청나라 황실과 이중삼중의 혼인관계로 맺어진 동몽골, 차하르칸 가문에서 완전히 떨어져 사실상 독립한 할하(대략 오늘날 몽골공화국), 그리고 할하에 밀려가 알타이산맥 이서의 초원을 지배하던 서몽골(오이라트→훗날 준가르)로 나뉘어 있었다.

<b>일리 초원에 새긴 ‘학살자의 자화자찬’</b> 평정준가르칙명격등산비. ‘(준가르가) 이미 은혜에 신속하고 의로움에 복종했기에, 격등산에 비를 새겨 억세까지 전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일리 초원에 새긴 ‘학살자의 자화자찬’ 평정준가르칙명격등산비. ‘(준가르가) 이미 은혜에 신속하고 의로움에 복종했기에, 격등산에 비를 새겨 억세까지 전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 준가르 흥기와 소멸 ‘거대한 시대착오’

갈단이라는 희대의 정복자가 서몽골에 등장할 때 청나라를 다스리던 이는 강희제(재위 1661~1722)였다. 당시 서몽골 지배층은 독실한 티베트 불교 신자들이었고, 준가르부의 수령 바아투르 홍타이지도 아들 중 갈단을 달라이 라마에게 보냈다. 갈단이 라싸에 있을 때 이복형제들이 친형 셍게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고, 소식을 들은 갈단은 귀향을 결심한다. 몇 년 후 그는 귀로에 올라 이복형제들을 죽이고 준가르부를 접수했으며(1676년), 즉시 서몽골 전체를 통합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칭기즈칸 가문에 범접할 수 없었지만 그는 달라이 라마로부터 받은 ‘보슉투칸’(하늘의 축복을 받은 칸)이라는 칭호를 받고서, 서몽골을 통합할 자격이 있다고 자부했다.

서몽골 통합한 준가르부의 갈단은
‘형제의 복수’ 빌미로 청에 맞서다
강희제에 크게 지고 퇴각하다 사망

갈단은 먼저 차가타이 가문의 마지막 왕손들로부터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들을 빼앗고 눈을 동쪽으로 돌렸다. 마침 당시 할하의 자삭투부(우익)와 투시에투(좌익)는 서로 싸우고 있었고, 그 와중에 갈단의 동생이 살해되었다. 1688년, 그는 동생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할하를 침공해 파죽지세로 진격했고, 패배한 투시에투칸은 고비 사막을 건너와 강희제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갈단은 강희제에게 즉각 그를 돌려보내라 했지만, 강희제는 이를 거부하고 화해를 종용하는 한편 전쟁을 준비했다. 갈단이 청에 완전히 신속한 내몽골로 이동하자 강희제는 영격에 나서 1690년 울란 부퉁에서 갈단의 군대와 마주쳤다. 준가르군은 낙타 다리를 묶어 장벽을 쌓고 그 위에 모전을 걸쳐 총격에 대응했지만, 대포알을 날리며 다가오는 청의 물량공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이 일로 할하가 청에 귀부했으니, 강희제는 할하를 지켰다는 명분과 그들의 복속을 얻어내는 실리를 다 챙겼다. 1695년 갈단이 다시 할하를 침공하자 강희제는 3로로 군대를 나누어 친정에 나섰다. 갈단은 퇴각했지만 우연히 자오 모도에서 만주의 서로군과 마주쳐 전투가 벌어져 다시 패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갈단이 원정을 벌이고 있을 때 일리 본영에서 조카인 체왕랍탄이 반기를 들어 부중을 접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갈단은 절망 속에서 알타이로 도주했다가 1697년 사망했다.

체왕랍탄은 서쪽으로 눈을 돌렸지만, 카자흐는 연전연패하면서도 기어이 복속을 거부했다. 카자흐의 결사항전은 누대로 서몽골의 침탈을 당하면서 생긴 적개심 때문이었다. 이제 준가르는 사방으로 둘러싸여, 알타이 북방 삼림민들에 대한 징세권을 두고 러시아와 격돌하고 타림 분지의 지배권을 두고 만주와도 경쟁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1717년 티베트 원정은 뼈저린 자충수였다. 당시 티베트에는 서몽골의 일파인 호쇼트의 라짱칸이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뿌리를 내린 상황이었다. 그가 만주와 연대하여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선출에 개입하자 티베트의 반대파 귀족들은 준가르에 손을 내밀었다. 준가르 6000여 병력이 돌연 라싸 앞에 나타났지만, 그들이 한 일은 약탈·학살과 반대파에 대한 살육이었다. 겨우 수만명이 어렵게 사는 종교 도시에 6000여 군인과 그 몇 배 되는 말이 들어와 짓밟고 먹어대니 라싸는 견딜 수 없었다. 티베트인들은 분노해 반(反)준가르 항쟁에 들어갔고, 1720년 청군과 연합하여 준가르를 쫓아냈다. 이 원정으로 귀한 전사들 태반이 죽은 것도 아쉽지만, 준가르가 몽골 전체와 만주가 신봉하는 종교의 보호자가 될 능력이 없음을 만방에 드러낸 것이 더 큰 손실이었다.

그의 조카 체왕랍탄은 티베트 침공
약탈·학살 자행해 원정 명분 잃어
결국 티베트·청 연합군에 쫓겨나
이후 청과의 공방·투항·반란 반복
1757년 건륭제에 의해 멸망

준가르의 새 군주 갈단체렝은 1731년 천산중부의 우룸치와 알타이 동부의 홉드를 두고 만주와 공방을 거듭했지만 승패에 관계없이 싸울수록 준가르가 불리해지는 형국이었다. 청은 월등한 인력에다 할하와 동몽골 지원병을 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밀리고 있을 때 군주가 죽으면 유목국가는 분열된다. 1745년 갈단체렝이 죽고 후계자가 섰으나 무능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다와치는 아무르사나의 지원을 받아 수령이 됐다. 그러나 아무르사나는 다와치와 대립해 싸우다 패해 부민을 데리고 청군에 투항하더니, 청군을 이끌고 와서 다와치를 제거했다(1753년). 그러나 아무르사나는 준가르 전체의 칸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다시 청에 반란을 일으켰다 패해 1757년 러시아 영내로 도주했다. 이렇게 준가르 국가는 외부의 힘이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망상에 빠진 한 신의 없는 인간에 의해 자멸했다. 승리 후 건륭제가 내린 명령은 단순했다.

“다 죽여라!(全行剿滅)”

직접 전투에 참가한 적이 없는 이 탁상 사령관은 할아버지(강희)보다 수십배나 잔인했다. <성무기(聖武記)>에 의하면 준가르부 중의 4할은 천연두로, 3할은 만주 군인들에게 죽고, 2할은 카자흐로 도주하고 1할만 고향에 남았다고 한다. 이렇게 세계의 여러 곳에서 민족국가들이 생겨나던 시기에 한 민족이 소멸되고 말았다. 준가르 국가는 칭기즈칸의 방식이 명을 다한 시점에 태어나 그 길을 따르다 사라졌다. 옛 방식으로 팽창하기 어려운 시점에 그것을 시도했으며, 티베트에서의 시대착오적인 약탈로 정치적인 무능을 드러냈다. 오늘날 내몽골은 중국으로 편입되었고 서몽골은 중국과 카자흐와 러시아 땅으로 나뉘었지만, 가운데 할하는 다행히 몽골공화국으로 남아 대몽골 울루스의 과거를 증언하고 있다.

■ 필자 공원국

[공원국의 세계의 절반, 유목문명사](20)군주가 시대착오에 빠진 나라는 멸망한다, 준가르가 그랬듯이

<춘추전국이야기>(11권)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을 쓰고, <말, 바퀴, 언어> 등 다수를 번역했다. 유라시아 유목문명에 관한 저술을 준비하는 동시에 파미르 고원에 장기 거주하며 현지 환경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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